최 모세(애틀랜타 문학회 회원)
자신의 삶이 깊어질 때 삶의 다양한 측면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크게 열린다.
열린 눈은 다양한 시각, 시각을 새롭게 하는 것,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보는 것에 의해 삶의 지평을 넓혀 가는 것이 아닌가?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본다는 것은 시련으로 단련된 균형 잡힌 시각(영적 분별력)을 말한다.
삶의 순수한 열망이 성숙함을 지향하는 도전 앞에서 삶의 깊이를 더하는 지혜를 어떻게 추구해나갈 수 있을까?
인간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바라보며 담대히 추구해 나갈 것인가?
이러한 삶의 명제 아래 삶의 연륜을 더하는 성숙이 이루어지는 것 같은데 실제적인 삶의 적용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자신의 모순을 발견한다.
이러한 모순이 삶의 난제라 할 수 있는데, 생각과는 달리 자신이 엉뚱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왜 그럴까? 자신의 교만과 어리석음 때문이다.
자신이 선택했던 결정이 삶을 흔들어 놓는 위기를 맞는 순간은 얼마나 처절하게 절규했던가.
위기의 실체는 외화내빈의 삶을 추구했던 자신에게 있었음을 성찰하게 된다.
외화내빈의 전형적인 삶은 겉치장의 모습이 세련미를 더해 화려하나 내면은 성숙함이 따라주지 못하는 빈약함에 헐벗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내면이 비어 있으면 허망한 것을 쫓는다.
자신의 겉치장으로 내면의 헐벗음을 가릴 수 있을까?
위선에 찌든 가식은 의식상태의 헐벗음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신의 오만하고 추한 모습이다. 인간의 추함은 욕망(탐욕)의 포로가 되는 집착에 있다.
집착이 부르는 마음 쏠림의 현상을 제어하지 못함은 이성의 판단 능력이 흐려졌기 때문이다.
이성의 판단 능력은 항상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균형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자신의 옳고 그름을 성찰할 수 있는 예리함을 길러야 한다.
인간관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인간의 생각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이성의 냉철함을 지니는 자제력(힘)이 건강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관계를 위태롭게 하는 편견과 반목, 독선과 아집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오랜 세월을 인간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진정성이 결여하고 있다면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가 힘들다. 아무리 애써 겉 좋은 모습으로 포장(미화)한다 할지라도 불성실한 관계는 드러나기 마련이다. 인간관계의 이해와 진정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거짓된 어둠의 실체는 어느 한순간에 드러나게 된다. 거짓이 진실을 이기지 못함이다.
진실이 잠시 외면당하는 때도 있지만 진실의 밝은 빛에 의해 어둠은 소멸한다.
진실에 다가가는 진지함은 성찰을 통해 이루어지는 변화된 모습이다.
사랑의 밝은 빛이 인간 영혼에 드리웠던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환희의 순간을 맞는 모습을 말이다. 그럼, 새로운 삶의 깊이를 더하는 지혜를 일상에서 어떻게 실현해 나갈 것인가?
현실적인 삶에서 지혜(삶의 기술: 히브리어의 다른 뜻)는 일반적인 적용에서 벗어나 더 유연함을 발휘해 기쁨의 날을 만들어 가는 신선한 과정이 되어야 하리라.
아름답고 풍요로운 일상을 창조해 나가는 슬기로움의 적용을 말하고자 함이다.
내면이 황폐해지면 육신의 쾌락과 허망한 가치를 추구한다.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시편 119:37) 자신의 욕망과 허영에서 벗어나 내면을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결단이 따라야 한다.
하루하루 의식세계의 풍요로움을 채우기 위해서는 내면이 깊어가고 영혼이 고양되는 빛으로 충만한 삶이 되어야 하리라.
이러한 영적 갈망이 삶의 깊이를 더하는 지혜이며 다양성 있는 삶에 대한 이해를 넓혀 가는 요체이다.
삶의 숱한 모순과 역설을 건강하게 살아내는 힘을 키우는 것이 삶의 깊이를 더하는 지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