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시인 나태주의 “행복”에서, “행복은 큰 것이 아니다/아주 작은 것…/행복은/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마음으로 보는 것…”이라 노래합니다.
<오늘 이 시대>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금생(今生)>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금생(今生)>에서 시인이 노래한 마음으로 보는<행복>의 가장 절실하고 가장 근원적인 토대는 사도 바울이 본문을 통하여 역설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영적에너지, 삶의 최고 비타민>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이해하려면 <대전제>가 필요한데, 그것은 <고전 3장>입니다.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보낸 <첫번째 편지>인 고린도전서 가운데 3장의 서신은 <고린도교회의 영적수준>을 대변하기에 가장 적합한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라”(고전3:1~2). 이런 간절함으로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심혈을 기울여 쓴 <러브레터>가 바로 <고전13장>입니다. 고전 13장의 특징은 모든 시제가 <현재형>입니다. 그리고 <나>라는 <1인칭 시점>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전 13장을 <1인칭 현재형의 메시지>라 부릅니다. 모든 적용의 대상이 <너>, <그, 혹은 그녀>, <그들>이 아니라, 모든 독자들, 즉 <나>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영적 현주소>는 <고린도교회의 영적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자각해야 합니다. 현실에 안주하며 현실타파에 급급하여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는 사람, <영적성숙이 절실한 바로 나>입니다. 이런 <나>를 향하여 바울은 본문 첫 절에서 <영적 대각성의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느니라”(고전13:1). 이 말씀에 대해서, 유진 피터슨의 예리한 번역은, “사람의 <웅변>이 힘과 설득력으로 가멸찬 감동을 주고, 하늘의 <천사>가 황홀경으로 감동을 선사한다 할지라도, <지금, 사랑하고있지 않다면> 나는 <탐욕의 문에서 삐걱대는 소음>일 뿐,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노래한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를 유진 피터슨은 “탐욕의 문에서 삐걱대는 소음”이라고 너무나 예리한 <영적 통찰력>으로 비수같은 말씀을 전합니다. <금생>의 삶을 웅변적인 미사여구와 환상적인 천사의 미소로 <금상첨화(錦上添花)>의 인생을 산다 할지라도, <사랑의 부재>는 <탐욕의 문에서 삐걱대는 소음>일 뿐입니다. 고전 13장의 에센스 중의 에센스인 7절과 13절에서 바울은 사랑을 한 마디로 표현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인생의 끝>은 분명히 있습니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 남기고 가야 할 것이 있다면, 금생(今生)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입니다. <사랑>은 세상 끝까지 항상 있어야 할,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가장 절실히 <금생(今生)>에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토대>, <인생의 토대>, <나의 전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