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눅11:28) 예수님의 산상설교 혹은 산상수훈, 산상보훈은 마태복음 5장, 6장, 7장입니다. 우리는 이 유명한 예수님의 메시지를 <산 위에서의 설교>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평지에서의 예수님 설교>로 유명한 말씀을 들자면, 바로 누가복음 11장입니다. 나아가서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서 공통의 시각으로 바라 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공관복음>이라 혹은, 이라 합니다.
본문이 기록된 누가복음 11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메시지의 논지는 <기도하라>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오늘날도 <기도에 관한 서적>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이런 현상의 본질은 <기도의 본질>에 대해서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예수님 공생애 시대에도 <기도의 본질>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기도의 무질서시대, 기도의 혼동시대>에 혁신을 일으켜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눅11장의 <평지수훈>. 즉 예수님의 평지설교의 서막은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로 시작하여 거기에 가장 적합한 응답으로 <주기도문>, <기도의 비유>, <세가지 기도유형>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 결론에 해당하는 말씀이 본문 눅11:28 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예수님의 메시지의 결론은 말씀의 끝이 아니라, 행동의 시작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언약의 일관성>을 담고 있는 <천국의 보화>입니다. 창세기~신명기에 이르는 <모세오경>에서부터 장차 들어갈 천국의 미래에 대한 예언서인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에게 비중을 두시고 <가장 존귀한 자>로 여기십니다. 세월이 변하고, 시대가 바뀌어도 결코 바꿀 수 없는 <십계명>의 언약 가운데 출 20장을 주목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한결같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 <말씀>을 지키는 자, <말씀>대로 행하는 자에게 <존귀와 영광>을 눈으로 보게 하십니다.
특별히 제 2계명, <우상을 만들지 말며 거기에 절하지 말라>고 하신 출 20:2~3을 깊이 묵상해보면, 하나님은 크게 사람을 <두 부류>로 보고 계십니다. <삼사 대(代)>와 <천 대(代)>입니다. <삼사 대(代)>는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을 무시한 자들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인 나를 미워하는 자”라 하시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말씀하십니다(출 20:5). 당대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다 해도 <멸문>의 위기가 임하거늘, 하물며 그 집안의 <사 대(代)>에 이르기까지 집중적으로 하나님의 저주가 <폭우>처럼 쏟아진다면 과연 그 가문이 존속할 수 있겠는가? <멸문지화(滅門之禍)>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의 관대하심은 <천 대의 존귀와 영광>을 택하기를 원하십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代)까지 은혜를 베푸시느니라.”(출 20:6)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에게는 영원토록 복을 내리리라>는 <존귀와 영광의 보장>의 언약입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의 평지수훈의 결론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성경의 결론인 요한계시록에 가서는 그 서막인 1장에서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로 재천명하십니다(계 1:3). 하나님께서는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복 있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복 있는 사람>으로 인생을 끝 맺기를 원하십니다. <천 대까지 은혜(복)를 베푸시느니라>. <영광과 존귀를 세세 무궁토록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천 대까지 <존귀한 자>로 쓰임받는 것이 얼마나 지혜로운 자일까?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라.”(벧후 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