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오후엔 비가 내릴 것이란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매일 가는 마을 가까이 있는 공원을 찾았다. 혹시나 하고 우산을 준비하고 산책길을 나섰는데 하늘이 무거워 견디지 못했던가 갑자기 거센 빗줄기가 쏟아진다. 굵은 빗발이 보일 정도로 무서운 기세로 퍼붓는다. 부근에 보이는 파빌리온에서 잠시 비를 피하다가 마침 우산을 들고 나선 걸음이라 빗길 속 산책을 즐겨볼 참으로 빗소리 리듬을 들으며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다 세차던 비가 주춤한 것 같아 하늘을 올려다 보았더니 먹구름이 몰려와 금방 다시 쏟아질 기세여서 산책을 그만 접어야 할 것 같다. 우산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정겨운 빗소리에 동요되지 말자며 마음을 붙든다. 한결 옥타브를 올리는 빗줄기를 손을 내밀어 받아본다. 빗방울을 튀기며 손바닥에 빗물이 고인다. 빗줄기를 타고 내려온 서늘함이 온 몸을 훑고 지나간다. 으스스한 한기가 찾아 든다.
비 오는 날이면 차디찬 금속성 감촉이 스며드는 냉엄도 즐길 수 있다. 순수와 푸름이 던져주는 생기도 좋을 수 있지만 비 오는 날에만 얻을 수 있는 감성으로 맑은 날 보다 흐린 날에 더 맑게 바라볼 수 있는 시야가 열리는 것도 마음에 든다. 하늘이 눈부시게 너무 맑은 날보다 비가 오는 날이면 세상을 더 맑게 바라볼 수 있는 시야가 열린다. 때론 너무 맑아서, 너무 고와서, 슬픔을 유추해 내기도 하지만 너무 맑은 날엔 견디기 힘든 삶의 무게와 덕지덕지 앉은 죄업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욱한 분진을 둘둘 말아 하늘에 휙 던져 버리면 한 바퀴 휘 돌아서 부메랑이 되어 다시 내게로 안겨와 다시 삶 속을 파고 든다. 맑은 하늘은 늘 이렇게 내겐 벅차다. 해서 우울도 함께 들어서기도 하지만 비가 오는 날은 테마 없는 빗소리부터 반길 수 밖에 없음이 신기하다. 빗물 소리에도 리듬이 있어서 인지 감성을 이입하고 보면 음향 효과의 진수에 젖어 들게 하는 묘미도 숨겨져 있다.
며칠이든 고적한 비가 내려주었으면 싶을 때가 있었다. 함께 울고 싶은, 함께 울어야 하는, 함께 울며 슬픔을 나눌 빗줄기 사연이 글줄로 죄다 써지는 날까지만 비가 내려 주었으면, 어느 시인은 눈이 부시도록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이 생각난다고 했지만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도 날카로운 번개의 몸부림 같은 고뇌와 슬픔에서 호전적 모순의 여유를 즐길 수 있음이 좋다.
이렇게 비가 오시는 날엔 마치 해질녘에 당도해버린, 생애의 마무리 부분에 들어서 버린 아쉬움이 빗줄기 따라 촉촉하게 젖어들기도 하지만 지금 이대로가 좋다. 다른 빛깔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고 싶은 마음이 헤적거리기도 하지만 지금껏 해온 것처럼 시심을 다듬으며 글쓰기는 놓아버릴 수 없다는 생각에는 흔들림이 없다. 음악회에 참석하다 보면 고운 악기를 연주하고 싶어지고 그림 전시회를 다녀오면 화폭에 열정을 쏟아 붓는 모습을 연상해보곤 하지만 글쓰기를 잠시 밀쳐 두거나 멀리 한다거나 詩가 내 곁을 떠나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두려운 일이라서, 서둘러 詩와 마주했던 시간 조각들을 건져 올린다. 홀로 간직했던 詩心을 조심스레 이음줄을 더듬어 보는 시간들이 따스하고 행복하다. 빗줄기가 만들어낸 뽀얀 시야가 詩心과 어우러지며 근사한 앙상블을 연출해낸다. 계절과 날씨 마다 노출되는 흐름이 다르긴 하지만 차분히 담아내다 보면 미지의 소리까지 담아낼 수 있는 행운을 만날 수도 있다.
오늘 같은 한더위를 택해서 내리는 비는 격정적인 소나기가 폭우로 돌변하는데도 오히려 서정적, 매혹에 이끌리게 된다. 직설적, 도발적일 것 같은 격정을 품고 대지 품을 찾아드는 애절한 해학이 돋보인다. 서정적인 봄비에 비하면 가을 빗소리는 찌무룩하니 착잡하고 침울해지는 헐거운 개성을 갖고 있다. 무풍지대 같은 겨울비는 명징한 주제 없이 음울한 분위기를 몰고 다닌다. 태풍과 뇌우를 동반한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비를 찬탄하지 않을 수 없음은 착한 척도 아니 하고 미운 짓도 아예 없다. 가끔은 몸도 마음도 찌뿌드드하다 싶을 땐 비라도 오시면 하고 비가 기다려질 때도 있다.
이렇게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눈물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비가 지닌 특유의 자신감이며 기품, 친근감에서 전해지는 애착이 취향으로 전수되었나 보다. 비는 하늘로서 내리는 물길이다. 비가 대자연에 당도하는 과정을 통해 이 땅에 물이 주어진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했다. 만물을 이롭게 하고 그 공적과 정성을 치하해달라고도 않으며 낮은 곳으로 낮은 몸짓으로 제 본연에 임하려 한다. 다투려 한다거나 순리를 따라 거스르지 아니하는, 막히면 돌아가는 밝은 절도와 지혜를 배우려 한다. 이렇듯 비 오는 날엔 무언으로 질타하는 빗소리 울림에 넉넉하게 젖어있고 싶어 환한 마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