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존재하는 그 어떤 삶에도 존재가치가 부여되지 아니한 것은 없다. 존재케 한 실체가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인생은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창조주 앞에서는 잘 살아왔든, 함부로 대충 살아왔든, 삶의 맥을 짚어 보면 도토리 키재기다. 지금껏 살아온 것만으로도 목적에 따른 존재가치를 부여 받았다는 감사로 하여 격조있는 생애의 마무리를 도모해야 할 시한이 다가온 것 같다. 노년을 추동하는 아우라에 집중하며 목적이 이끌어 온 삶을 갈무리로 매듭 해야할 기점에서 내려놓음을 복습하는 길로 들어섰다. 나이가 깊어 갈수록 눈가 주름도 친숙해지고, 그럴 수도 있지가 쉬워진다. 생을 스쳐가는 번민, 고뇌, 희로애락 마저도, 희극도 비극도 흘러간 정경처럼 아득해지는 초월로 자리잡게 된다. 기어코 붙들어야 했던 것에도 내려놓음이 수월해지고 비움의 찬스에 비켜서지 않았던 뒤늦은 깨달음까지도 대견해진다. 세월이 건네준 비전은 비움과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었다. 몸은 시들어도 가슴으로 삶을 느끼고 흐려진 시력으로도 삶을 볼 줄 알게 된다. 남은 날이 더 짧은 노구의 앞날보다 자손의 앞날과 사명의 번창을 전심으로 기도하는 시간들로 채워지고 있다.
동년배 할머니들은 어찌된 셈인지 남성화 길로 접어들고 바깥 어르신들께서는 점차 여성화로 바뀌어 간다. 안방마님 자리를 지켜내느라 집안에서 맴돌던 마나님들은 밖으로 나갈 구실을 수없이 꿰고 있는데, 가족 부양을 등짐 삼고 살아오느라 노심초사 밖으로만 나돌던 남정네들은 서서히 집안에서 맴돌고 싶어한다. 목소리가 컸던 시절엔 아내를 이겨 먹고 살았지만, 바람 따라 세월 따라 배려라는 무대를 만들고 조금씩 양보하며 지고 살아야 하는 연기에 몰두한다. 해서 할아버지들은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도 가슴에 한기를 느낀다고 했나보다. 노을지는 하늘을 우러르다 보면 공연스레 눈꼬리에 눈물이 고이고, 책임져야 했던 무거운 가장의 자리에서 해방된 민족이 되었지만 가슴은 더 비워낼 것 없이 텅하니 빈 둥지가 되어버렸다. 종일을 손주들 틈바구니에서 복작거렸는데 해가 지면 삭막한 공허를 달래게 되는 것은 외로움과 겨룰 힘이 소진돼 버렸기 때문일 게다.
몫의 외로움을 겸허히 받아 들이는 일 까지도 노년의 향훈이리라. 삶의 순간들을 자욱하게 번져나는 향내로 가공하는 노구의 충만이 아름답다. 은은한 들꽃 내음처럼 그윽하게 흘러가고 싶음이 노년의 사치는 아닐까 싶으면서도 땀방울의 노고로 생을 바친 껍데기는 사뭇 초라하지만 이 또한 순리이며 질서로 받아 들인지 오래다. 자손들은 주어진 소명의 자리를 잘 지켜주었고 제 앞 닦음에 충실한 모습들이 대견하고 자랑스럽고 존경심까지 우러난다. 그 간의 기쁨과 보람은 노년의 아낙에 이르기까지 노구를 버틸 수 있는 버팀목으로 남은 날 동안을 품어줄 꿈의 보루가 되어줄 것이다. 노년으로 들어선 것은 생의 과정일 뿐 마지막 끝이 아니란 것이다. 노년이란 지각과 이성의 사고에서 살아온 동안을 통칭해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시점으로 생애 중 가장 나답게 살아 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 받은 적기라 할 수 있겠다.
지금껏 살아보지 못한 값진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설 수 있는 도전을 시도해 볼만한 충분한 값어치가 있다. 하루의 마지막을 불태우는 노을같은 생의 정점을 구사해낼 수 있는 마지막 행운을 누릴 절호의 시기가 아닐까. 노년의 상징인 느림의 미학까지 접목한다면 여유롭게 경험해보지 않았던 영역에까지 새로운 분야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나이의 무게에 짓눌려 사회적 약자가 되어야 한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매여 있기 보다는 피할 수 없다면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했다. 번듯한 나무는 용도에 따라 다 잘려 나가고 굽어지고 뒤틀린 나무라 타박받던 나무가 마을을 지키 듯 나이들어 쓸모 없어 보일지라도 오히려 제 구실을 해낸다는 옛말에 힘을 얻는다.
언어의 밭을 갈고 모내기를 하고 노심초사 논두렁 풀베기를 하고 이삭이 피기까지 세상 아름다움과 진실의 물을 대고 이삭이 여물 무렵이면 물꼬를 열어두고, 도랑치기가 끝나면 나락이 익을 때를 기다리다가 벼 베기로 들어간다. 언어의 알곡이 고방에 가득 쌓여가면 원고지를 덮고 집필을 접어야 할 때가 아닐까. 글쓰기 마지막 궁극의 고지가 저 만치에 보이듯 한다. 생이란 미리 알림이 없이 섭리로 진행된다. 세상을 잠깐 빌려 살면서 목초지를 찾아 유랑하는 순례자로 살아가다 본향으로 돌아가는 유목민의 삶이다. 가까운 날, 이 긴 순례의 여정이 끝나면 오늘같은 노을이 황홀하게 하늘을 물들일 것이다.
밝은 태양 아래 신선한 바람을 느끼고 있는 지금의 삶이 터무니 없는 은총임에 비우고 감사하자고 다짐하게 된다. 하루를 다한 찬란한 노을 앞에 섰다. 간결하고 여미한 노년으로 나이 들고 싶은 소망을 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