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한 세기를 살아오신 시대적 산 역사의 증인이나 다름 없으신 102세 되신 어머님을 모시고 식사를 나누면서 맞은편에 걸린 액자에 눈길이 간다. ‘생활은 단순하게 생각은 고상하게’이 집을 지켜오신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문장이라 마음에 새기게 될 것 같다.
노모님 따님께서는 성품이 활달하셨다. 사위 분은 말수가 적으시고 과묵하신 편이었지만 가끔씩 유머러스한 폭죽을 터뜨리시곤 하셨다. 그 틈새를 기회삼아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손사레를 치시면서 자리를 피하신다. 한번 정한 길은 변함이 없으신 분으로 연로하신 장모님을 대하실 때는 매사 신중하시고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이시며 자상하시고 침착 하셨다.
식사 테이블에서 노모를 모시는 사위 분의 손길엔 오랜 시간 동안의 답습이 담긴 사랑이 묻어 있다. 보이기 위한 손길인지 마음에서 우러난 몸에 배인 손길인지 선명히 드러나는 손길이었다. 어머님을 보살피는 손길이 친아들도 그렇게 하기 힘들겠다 싶을 만큼. 식사가 시작 되기 전에 먼저 작은 에이프런을 어머님 앞에 둘러 주시고 식사 내내 어린아이 돌보듯 찬찬히 보살피신다. 식사가 끝나신 노모님 입가를 닦아 주시는 손길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렁이는 감동의 파도로 하여 식사가 잘 넘어가지 않았다.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두 손녀도 할머니 안부를 거의 매일 물어온다고 했다. 효심이란 아름다운 마음 유전이 가족 사랑의 바탕이 되는 것임을 새롭 듯 각인하게 된다.
어찌하여 이토록 올곧은 마음 자세로 지극정성으로 어머님을 모셔왔는지 여쭈어 보지 않을 수 없어 넌지시 말씀을 드렸더니 우문현답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어머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머님 삶 속에 들어와 함께 생활하고 있어요.” 따님의 효심에 젖은 말씀에 몸 속에 퇴적된 불순물이 융기되어 균열이 가듯 온 몸이 흔들리고 뜨거워진다. 어머님께서 나를 키워주셨고 사랑하는 자식을 보살피며 키워주셨기 때문이란다. 그러면 사위 분의 사랑은 어떤 설명이 부언되어야 할까. 어떠한 이유나 까닭을 떠나 자식이 연로 하신 어머님 노후를 돌보아야 하는 것은 의례히 원래부터 기정 사실로 정해져 온 것으로 당연한 것이라 하신다. 이미 세상을 떠나신 어머님을 마음 닿는데까지 제대로 모시지 못한 빈 마음을 장모님께 쏟아 붓는다고는 하셨지만 그러한 뜻으로 받아들이기엔 충분히 납득되지 않는 정성과 사랑의 손길은 미제사건처럼 마음에 남겨져 있다. 아쉬움과 회의감에서 자생한 효심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부 일심동체’ 라는 말이 가장 적절하게 어울리는 부부 모습이었다. 어머님을 섬기는 마음에서 멈추지 않으며 도움이 필요한 주위분들을 도우려는 사명감이 유난히 돋보인다. 시대의 등불같은 분들이시다.
파상적으로 밀려드는 세상의 휘둘림이 두려워 현실을 비켜서고 싶을 때, 회복 불가능이란 지레짐작으로 세상을 살아내야 할 걸음걸이가 한층 더 무겁다는 느낌이 밀려들 때, 의식 흐름을 바꾸기에 이만한 아름다운 사람들과의 만남이 어디 쉽겠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분주한 세상살이 가운데 이러한 맑고 고운 가족 사랑이 있었던가. 무더위를 식혀주는 산뜻한 바람 줄기같은 청량하고 신선한 뉴스가 우리들 곁에 있었던가. 밝고 따뜻한 솔직함이 더없이 빛난다. 인간의 욕심에 가려진 이면세계에까지 말끔히 씻겨지는 사랑의 진수를 맛보게 된 신선한 시간이었다.
세상은 소중한 무엇인가를 잊은 채 분주히들 살아가고 있다. 귀하고 보배로운 가족과 이웃을 향한 가치관 결여가 아닐까 한다. 말씀을 통해 찬양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일에는 능숙하지만 이웃의 고통과 어려움에 동참하려는 준비된 인생의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 일에 얼마나 깊은 시선을 두었던가. 마음이 무겁다. 부끄러운 자화상과 만난 날이다.
아름다운 가족을 만나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떨린다. 효심이란 명제 앞의 죄책감일까.
시대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불효의 죄업 때문일까. 실로 오랜만에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삶의 향기를 접한 때문일까. 혹여 Rock Spring Park 산책길에서 아름다운 가족을 만나시는 분마다 마음이 예뻐졌으면 하고 소망이 저절로 우러나는 날이었다. 오랜 시간 아름다운 삶의 향기가 드리워지는 우리 한인 공동체가 되어지기를 갈망해 왔던 보람을 이제서라도 엿보게 되었다면 지나친 과언이 되어질까 조심스럽긴 하나 꽃처럼 피어난 아름다운 미담이 우리 한인 사회 이야기라서 자랑스러운 긍지에 마음은 하냥 훈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