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희 목사
지난주에 이어서 성인아동을 극복하는 과제에 있어서 몇가지로 정리해봅니다. 첫째로 우리들 자신의 인격적 성숙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숙한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본래 나를 지어주실 때의 나 자신의 모습이 되어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혹은 스스로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반면 이 성인 아동이라는 것은 어른이 되긴 했는데도 여전히 누군가를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이 과거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마마보이” 혹은 “파파보이’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한국에서 아이들을 기르는 부모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과보호의 경향을 너무나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과보호는 어린아이의 성장에 결정적으로 유해한 경험들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지나친 부모의 보호 속에 자라나게 되면 어린아이는 자기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자기가 누군지 모릅니다. 아마 이런 경향을 풍자하는 이야기라고 생각이 되는데 저는 어떤 젊은 분에게서 이런 우스갯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엄마 시리즈”가운데 하나입니다. 한 꼬마가 엄마에게 말하기를 “엄마. 나 맞아? 엄마. 나 맞아?”라고 묻더랍니다. 그러자 엄마가 “그래 맞다니까”라고 대답을했겠지요. 그러자 계속해서 이 아이는 엄마 나 정말 나 맞아라고 물었고 엄마는 정말 그렇다니까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 꼬마가 한다는 대답이 “그런데 왜 애들이 나보고 너래”라고 묻더랍니다. 이 이야기는 그냥 지나가는 한 농담에 불과하지만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채 살고 있는지에 대한 대표적인 상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지나치게 보호할 때 대부분 그 배후에 숨어있는 동기는 이런 것입니다. 혹시 이러다 이 아이가 실패하면 어쩔까? 사실 부모가 하는 것이 아이들이 하는 것보다는 모든 면에서 훨씬 낫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을 대신해서 부모들이 결정도 해 주고 보호도 해주고 이끌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실패하고 자기 스스로 일어나는 경험을 갖지 못하며 자라난 사람은 언제나 마음 속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항상 누군가를 의존해야만 됩니다. 그러다보면 성숙한 자기의 모습을 만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건강하고도 인격적인 성숙을 기대할 수 없는 생애를 살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 성인아동이 가진 첫 번째 비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인 아동을 극복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성인 아동의 극복이야말로 건강한 부부관계를 갖는데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제게 상담을 요청했던 분 가운데 이런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중소기업의 젊은 사업가로 우리 사회의 기준으로 볼 때도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부지런한 기업가로 장래가 매우 촉망되는 사람으로 평가를 해 주었습니다. 이렇듯 그는 사회적으로 볼 때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자기 아내와의 관계 때문에 저에게 와서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는 집에만 들어가면 신경질이 난다고 합니다. 아내가 특별한 잘못도 없는데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미모도 뛰어나고 공부도 많이 했으며 매력도 있어서 다른 사람이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참 좋은 아내였습니다. 그런 사실을 그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내만 보면 화가 났고 그러다 보니 아내에게 건강한 애정 표현을 하지 못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가끔씩은 그 화를 못 이겨서 아내에게 손을 대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가 이러면 안되는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이러지 말아야지 다짐도 했습니다.
이 분의 이야기를 다 듣고보니 자신의 어릴적에 성장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다음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