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자(숙명여대 미주총회장)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물어 가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봄을 시작하고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신영복 에세이에서)
세월 속에 내 가슴에 잊혀지지 않는 ‘감옥으로부터 사색’은 경황없이 살아온 우리들의 정수리를 찌르는 뼈아픈 일침이면서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자기 성찰의 맑은 거울이었다. 그 작은 엽서의 글들은 감옥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 한 인간의 뼈아픈 초상이었으며 동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읽는 우리들 자신의 초상화였는지도 모른다. 저자 신영복 교수는 대한민국 경제학자였다. 1988년 독재 정권의 터무니 없는 민청 간첩으로 오인된 한 인간을 무기징역으로 남한산성 교도소에서 보내 온 신영복 교수의 글과 그림, 서예를 세상에 내놓은 여러 권의 책 중 하나이다. 세월이 저만큼 가버린 지금도 내 책상 머리에 ‘오늘을 처음 처럼’ 시작하고 싶은 신영복 교수님을 다시 만난다. 그가 대학 시절 우연히 야유회에서 만난 초등학교 어린 학생들에게 스승과 제자로 만나 초코렛도 사주고 가난에 찌든 그 동심에게 노래도 가르쳤었다. 그때 가르쳤던 노래가 이북을 찬양하는 노래였다는 정보부의 터무니 없는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으로 옥살이를 하게 된다. 1993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작은 엽서가 세상에 나온 글이요, 그림들이다. 그때 그림, 글들은 어린 조카들에게 보낸 작은 엽서였다. 내가 대학시절 숙명여대 경제학 교수셨던 교수님을 교정에서 가끔 뵐 수 있었다. 우리 인생은 어쩌면 여행에 비유하기도한다.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에서 가슴까지 여행’이라한다. 독재의 수많은 희생물이 되어 사라져 버린 그 희생이 오늘 우리 민주화의 희생물이었음을 우린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아닌 가슴에 새기고 아파해야 한다. 선생님 살아계신다면 묻고싶은 한 마디는 그 역경에서 어떻게 그 ‘마음의 빛(Enlightment)을 밝힐수 있으셨는지입니다. 그 높은 지성, 각성으로 날마다 새날을 맞이 하실 수 있는 ‘깨어있음’ 그 성찰은 어떤 종교적인 차원을 떠난 번쩍이는 섬광이었습니다. 자유를 갈구하시기 전 이미 자유함을 누리시며 평화를 가슴에 깊이 묻고 누리신 선생님의 그 경지 영혼 깊숙히 묻어두신 그 밝은 빛을 사랑합니다. 우린 산소가 없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누가 산소를 생명이라 말하는 이가 없듯이 칠흙같은 어둠에 갇혀 있는 현대인들은 그 ‘마음의 빛’을 잃었습니다. 선생님 억울한 20년의 감옥살이가 한동안 내가 누린 자유함이란 과연 무엇이었나… 길이 없는 길에서 홀로 헤매기도 했습니다. 그 감옥은 선생님의 글, 그림, 사색을 위한 ‘훈도의 가마’였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때, 그시절 그 아픔들이 교수님의 글, 그림, 에세이에 고스란히 지금도 전해져 새 하늘, 새 땅이 열리는 영안이 열리는 내 자신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기도합니다. 어떻게 그 혹한의 작은 감방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성찰을 하실 수 있었는지요.? 그 누구의 얘기를 다 들어준 뒤에 나 자신을 마지막 성찰할 수 있다는 그 말씀이 다시 나를 성찰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마치 유태인 학살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처참한 강제수용소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도 있었음을 돌아보는 뼈아픈 사실을 후손들은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의 그림을 보면서 그 서화의 정신은 그 작은 감방에서 온 우주를 보시는 선생님의 그 혜안, 진정 그리움이 무엇인지, 아무도 그 예술가의 경지를 넘나들 수 없는 마음의 빛이요, 자유함이었습니다. 이제 시대가 변하여 기계 문명에 인간을 삼키고 인간의 참모습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빛난다.’‘야심 성유휘’란 말씀은 따뜻한 위로가 됩니다. 어둠을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정직함을 일깨우는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미국의 남쪽 땅 남북 전쟁의 요새지 아틀란타에 반 세기를 살면서 고국의 그리움으로 조국에 큰 스승들을 모시면서 선생님을 다시 그리워합니다. 돌산 아래 가끔 들려오는 새벽 종소리에 잠이 깨어 묵은 어제를 털어내고 ‘처음처럼’선생님 글을 마음에 담아봅니다. 백년된 노송들과 봄, 여름, 갈, 겨울을 함께 살아온 그 ‘천인무성’의 인내를 닮아보려 합니다. 백도가 넘는 끊는 여름에 잎새하나도 미동하지 않는 그 푸르름에 고목의 청푸른 솔에 인간인 난 왜 그리 왜소한지요.
보리수.
우리는 어린 손자의
모습에서 그 할아버지의 모습이 계승되고 있음을
깨닫기도 하고 사제 붕우같은 인간관계를통해서도
우리의 존재가 윤회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합니다.나의 존재는 누군가의 생을 잇고 있으며
동시에 누군가의 생을 이어지고
있음을 깨닫기도 합니다. 존재의 윤회가 아니라
관계의 윤회입니다. 나의 생각을 윤회라는 그릇에 담아봅니다.
처음처럼. ㅡ
글 중에서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