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우리 노부부가 함께 지내고 있는 시니어아파트는 초록으로 둘러싸인 풍광을 배경으로 삼은 14층 고층 빌딩이다. 내부로 들어서면 긴 복도를 두고 양쪽으로 문을 마주하며 오손도손 300여 세대가 살고 있다. 방음벽 설치도 우수한 편이라 옆집 TV 소리도 완벽하게 차단되고 층간 소음 또한 거의 없는 편이다. 무엇에도 침해받지 않는 이만한 공간을 어디서 만날까 싶다. 물리적 공간을 나뉘는 문은 존재하지만 문 없는 세상처럼 평온하고 고요하고 평화롭다. 한데 어쩜인지 바깥 세상은 줄곧 소란하다. 마음 문을 여닫는 소리가 수선스럽다. 끼리끼리 인줄 알았는데 어느 틈엔가 분리, 분해되고 또다른 모임이 열리기 바쁘게 와해되고 붕괴되는 코미디가 심심찮게 연출되고 있다.
모태로부터 시작된 여정은 숱한 문을 지나 오늘에까지 살아오면서도 처음 만나는 문 앞에 서면 기억에도 없는 익숙하지 않은 낯설음에 초조하고 서먹한 두려움과 생경한 설렘이 엇갈린다. 문을 지나 전개될 생소한 경험하지 못했던 서늘한 찬 느낌이 인다. 확실하지 않은 전개와 미래가 문이 열리는 순간 냉한 공기가 엄습해 올 것 같아서 차마 문 손잡이 잡기에 경건한 마음이 된다. 건물마다 문이 존재하고 적당한 통제가 이루어지고 개인 복지가 보호받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문들이 누구나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문이 아니란 것이다. 사물을 갖다 들이거나 출입이 필요할 땐 열고, 언제 빗장을 질러야 하는지 문 마다 원칙이 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도 문이 있다. 적당한 규범없이 마냥 열어 두어서도, 시도 때도 없이 잠가둘 수도 없는 것이 마음 문이다. 세상을 향해 내처 믿는다는 식으로나 받아들이는 상황으로 마음을 열어 놓는다면 과연 개인의 마음과 생각을 보호받을 수 있을까. 자주 듣게 되는 구호처럼 열린 마음, 열린 생각, 열린 시대가 가능할까.
수긍되는 부분과 이해가 닿지 않는 부분의 분별점이 분명한 상황이어야 마음 문을 평안하게 열어둘 수 있을 것 같은데, 문이란 존재에는 언제고 어디서고 무단 침입자가 있기 마련이라 마음의 문도 열고 닫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아야 사생활을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다.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적당한 거절도 주고 받을 줄 아는, 수위 조절을 서로 지켜가야 할 것 같은데 문명의 이기는 갈수록 마음 문을 더욱 단단하게 굳게 닫을 수 밖에 없는 풍토를 조성해 가고있다.
현대인들의 마음 문들이 차라리 흔한 자동문처럼 다가서기만 해도 소리없이 열리는 시대가 도래하기를 기대해보고 싶은데. 마음 문이 일단 닫혀버리면 화려한 미사여구도 시각적 어떠한 현란한 무대가 펼쳐져도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이라서. 진심 어린 어루만짐 외에는 닫힘을 열림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 사람 마음이 아닌가. 세태 시류 추세는 가는 곳 마다 소리로 가득 채워져 있어 세상 소란이 집안으로 다 들어와 있는, 흡사 문이 노상 열려있는 국면에 처해있다.
세상이 수선스러울수록 마음에 평안이 깃들어야 마음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인데 마음 문이 열렸다 하면 무단으로 사전 허락 없이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음에도 마음을 유린당하고 침범 당하고 훼손당하게 된다. 사전에 문단속을 할 줄 아는 기본적인 지혜를 익혀두어야 할 일이다. 일련의 목적이나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는 일이 발생될 위험을 안고 있음에도 차마 거절을 못하는 것은 지혜가 짧은 것이 아니라 판단능력 부족이다. 개인 삶에 차질을 빚을 낌새를 느끼면서도 거절을 못하는 것은 이해와 양보보다 거절할 줄 아는 능력을 소유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언제까지나 줄곧 마냥 마음 문을 열어둔 채 살고 싶은데, 이 만큼의 나이에 거절할 줄 아는 통제 능력 수치가 얼마쯤일까. 대략 난감이다.
마음 문을 편안하게 열어두는 사람, 부지런히 닫으려는 사람, 그 문을 열고 싶어 계속 노크하는 사람, 각양이지만 몸보다 마음이 먼저이고 우리는 그 마음 속에 살아가고 있다. 겉모습은 갈수록 볼품없이 후패해가지만 날마다 새롭게 마음을 열어가기를 기도 드리게 된다. 육신의 약함을 지닌 인간인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