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원(애틀랜타 거주)
지난 4월 중순에 애틀랜타를 출발, 8년 만에 아내와 함께 고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8년 만에 본 한국은 명실공히 선진국다운 면모를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었는데 제일 눈에 띄는 현상은 70-80년대 당시 너나할 것 없이 온 국민 모두가 입에 달고 다니던 “빨리빨리” 라는 말이 거의 사라졌고 또한 고속도로와 지하철 같은 인프라가 전국적인 차원에서 미국보다 더 깨끗하게 잘 되어 있다는 놀라운 사실과, 서울과 주요 대도시 어디에나 마치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위용으로 치솟아 있는 고층아파트 그리고 최고급 외제 승용차의 범람이었다.
그런데 한국정부에서 건축 안전규정과 자동화 공정을 직접 관장했던 친구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 고층 아파트의 안전기준은 세계 최상위이고 건설기술도 역시 상위권이라고 하니 1970년 4월 마포구 창전동의 5층 아파트가 부실공사로 와르르 무너져서 국민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던 와우 아파트 붕괴 이야기는 황성옛터의 전설이 되어버렸다. 안전기준을 엄수한다는 말은 곧 인간의 생명을 가장 중시한다는 선진국이 되기위한 분수령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관광지는 물론 거주지역도 어디나 잘 정돈되어 있었으며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장실도 너무도 청결하게 위생시설이 아주 좋았다. 무엇보다도 커피숍에서 노트북 컴퓨터를 깜빡 잊고 집에 왔어도 다시 돌아가 보면 바로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나라가 한국이라니 소매치기가 극성을 부리던70년대에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한다.
우리 부부와 동서형님 내외는 4박5일 일정으로 전라도 지방으로 출발했는데 그 첫 행선지는 전남 담양군 남면에 자리잡은 가사문학관 이었다.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다시 호남 고속도로로 갈아타고 가는데 한국은 전 국토의 70%가 산인지라 사방의 풍광이 정말 아름다웠다.
멋진 한옥의 가사문학관은 2000년에 개관했다고 하는데, 가사(歌辭)란 조선 초기까지 주로 한문(漢文)으로만 시를 지었으나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이후 선조 때에 좌의정 정철이 순수한 우리말로 지은 사미인곡이 첫 번째 한글시라고 하는데 그 이후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삼정승을 모두 지냈다는 정철은 당시 동인과 서인의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 서인이었던 영의정 이산해의 모략으로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하다 신성군을 염두에 둔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삭탈관직되어 좌의정에서 실각되었다. 그는 고향인 창평으로 퇴거해서 군주인 선조를 마치 자신이 그리는 님으로 표현하면서 떠나버린 님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마음을 유려한 필치로 묘사한 사미인곡이 서사 중사 결사(결론)로 정리되서 기다란 액자로 벽에 걸려 있었다.
때마침 원장으로 있는 이정옥 여사는 사미인곡에 얽힌 정철의 충정을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수 천자로 된 긴 서정시를 달달 외워가며 풍부한 감성을 불어넣어서 전라도 토박이의 발음으로 술술 읆어나가는데 과연 가사문학관 해설위원을 할 만한 자격이 차고 넘쳐보였다. 정철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을 남겼는데 율곡과 절친한 사이였던 정철의 특징은 강직하고 반골기질이 강한 조선의 위대한 선비였다.
이틀째 되는날 우리가 방문한 곳은 전남 강진에 있는 다산 정약용 박물관이다.
다산은 정조와 함께 조선조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핵심 브레인으로 4살에 천자문을 배웠고 7 살때 “바다”라는 시를 지었던 신동으로 알려져있다. 8대 조상이 연이어 모두 홍문관 명부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명문집안 출신으로 유네스코에서는 2012년 다산 탄생 250주년을 맞이하여 네 명의 세계 기념비적 인물을 선정했는데 사회계약론을 쓴 스위스의 장자크 루소, 독일계 스위스인 시인이었던 헤르만 헤세, 프랑스의 작곡가 드뷔시 그리고 다산 정약용이 선정되었다.
다산은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유학자요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였고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노론의 끈질긴 음모로 정치적인 위기에 몰렸을때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큰 형인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 일으킨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류되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문학, 예술, 과학, 의학, 미학 , 법학, 경제 등 학문의 모든 문야에 걸쳐서 전대미문의 여유당 전서 500권의 저술을 남겼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역시 공직자들의 청렴함을 강조하는 목민심서와 나라의 행정을 조직화하는 경세유표이다. 또한 주역을 독특한 방법으로 해석해서 다산 주역을 남기기도 했다.
나는 박물관을 돌아본 후 강진만을 굽어보고 있는 만덕산의 45도 고바위 언덕을 300미터 정도 기어 올라가서 그가 오랜 세월 동안 온종일 서재에 앉아서 집필에 몰두했던 다산 동암과 손님이 찿아왔을 때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다산초당(추사 김정희 친필)을 둘러보면서 18년간 치열한 삶을 살다간 인간 정약용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프로이트는 고독은 혼자있는 즐거움이고 외로움은 혼자있는 고통이라고 말했는데 다산은 고독을 즐기며 조선의 선비들이 꿈꾸던 부정부패 없는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기 위해 단칸방에서 불철주야 노력한 위대한 학자였다. 그런데 그가 떠난지 260년 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꿈은 한낱 공허한 메아리로 남아있으니 한국의 정치인들은 좀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관광 후 강진읍의 다강 한정식 식당에서 우리 일행이 먹은 정식은 내가 일생 동안 먹어본 한식 중에 최고로 맛있었고 또 전라도의 자랑인 20첩 밥상을 처음 먹어보았다. 그 다음 날 우리 일행은 80만평의 넓디 넓은 순천만 습지 생태공원을 유유히 걸으면서 광활한 생태계에 사는 무수한 철새들 그리고 갯벌에 기어다니는 수많은 게들과 한마음이 되어 넋을 잃고 동심으로 돌아가 마음껏 여수를 즐겼다.
5일 동안 우리 부부를 위해 손수 운전을 하면서 한반도의 끝인 남해까지 자상한 가이드를 해주신 동서 형님 억수로 수고하셨어요…. 우리나라가 이렇게 아름다운 땅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네요.
애틀랜타에서 김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