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엄마”라는 단어는 <세계 공용어>입니다. <최초로>, “어머니”라는 단어가 성경에 등장한 곳은 <창세기 17:15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내 이름을 <사라> 즉, “우리의 어머니”(열국의 어미)라는 뜻으로 개명해주시면서 유래된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를 친근감 있게 부른다면, “울엄마”가 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배우는 언어가 바로 “엄마”입니다. 요 19:27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시면서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부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시게 되어 죽음을 맞는 순간, 자식은 “하늘이 무너진다”고 하여 그것을 <천붕(天崩)>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 있습니다. 그 <가슴 아픈 슬픔의 흔적>은 바로 자식이 부모 앞에 죽을 때, 부모님은 자식을 <가슴>에 묻습니다. 본문의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마리아와 예수님을 <엄마와 아들의 인연>으로 맺어주셨는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눈앞에서 고통당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그저 지켜봐야만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을까요?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어머니>를 “여자”로 부르시고 계십니다. 요 19:26절에,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Woman, here is your son).” 왜 예수님은 <어머니>를 “여자”로 불렀을까요? 그 이유는 자식으로서 어머니보다 앞서 가면서 마지막으로 홀로 남으실 <어머니>를 위해 무엇을 해드리는 것이 <가장 큰 효(孝)>인지를 고민하신 것입니다. 숙고(熟考) 끝에,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예수님 대신에 그 역할을 맡기셔야겠다는 각오가 서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 마리아를 가장 잘 도와드릴 수 있는 <최고의 효>로 어머니가 <연약한 여자>임을 각인시켜 주어야겠다는 결심이 서신 것입니다. 옛 속담에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언제 강합니까? 어머니께서는 자식을 향하여 <보호자>의 보호본능을 가지실 때, <태산도 움직일 만큼의 강한 초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어머니께서는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제공자>의 본능을 가지실 때 강하십니다. 어머니께서는 자식을 위해 아낌없이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한 생명의 탄생>을 위해 <열 달> 동안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고마우신 분>이십니다.
이토록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면서도 전혀 내색도 하지 않으시는 분. 마지막 세상을 떠나시는 그 순간까지도 눈물을 흘리시며 이 세상에서 못다한 사랑, 더 이상 자식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지 못하시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시며 눈을 감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머니>를 향하여 효도를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인가?’를 몸소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어머니를 더 이상 <언제나 강한 철인>이 아니라, <연약한 여자>로 보는 <사랑의 눈>을 뜨라는 것입니다. “여자여!”, 이 말씀의 뜻은, “나의 어머니를 이제부터 예수님 대신에 <보호자>가 되어서 보호를 해드려라. <제공자>가 되어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내어드려라.” 이 <마음의 진정한 실행과 그 중심>이 바로 <효(孝)>입니다. 언제부터<효(孝)>를 실천할 것인가? 요한복음 19:27은 너무나 선명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 그때부터.” 예수님의 말씀대로 <효의 가장 적절한 실행시기(Golden Time)>는 <바로 오늘>입니다. <어제>도 아닙니다. <내일>도 아닙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오늘, 지금 이순간부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