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여럿이 둘러앉은 자리는 언제나 정겹다. 새로운 멤버로 낯선 분이 함께하시게 되었다. 반갑다는 인사를 나누면서 차츰 알아가야 할 관계의 도모를 설계해 본다. 오래 전 잠깐 스쳤던 일이 떠오르기도 하고 어디서 뵌 것 같은 데를 중얼거리며 기억 줄을 부산스럽게 더듬어 본다. 혹시나하고 기억에 남아 있는 부분을 여쭈었더니 어쩔 줄 몰라하신다. 한참 동안 서로의 기억 퍼즐을 맞추느라 열기구를 탄 듯 둥실둥실 즐거웠다. 만날 때마다 나눌 이야기 거리가 상큼한 봄햇살 만큼이나 기대된다. 그렇다. 서로를 안다는 것은, 서로를 알아 본다는 것은, 서로에게 남겨진 기억이 행복했다는 것은, 남은 만남까지도 행복하게 이어줄 수 있다는 청신호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문득 내가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서로를 아는 사이의 정석인 사람은 누구일까. 뉘엿뉘엿 노년에 이르는 동안 이어져 온 수많은 관계를 모아본다. 인연의 손잡음이 모두 아는 사람들과 한 마음이었으면 좋으련만. 나는 위로가 되는 사람으로 품고 싶은데 상대는 아닐 수도 있을 것이라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갈수록 난해하고 심원해지는 양상을 띠고 흘러가고 있다. 때로는 모호한 수수께끼 같기도 하고 뒤얽힌 미로를 연상케 할 만큼 복잡한 곤혹을 치르기도 한다. 결절되고 꼬이고 꿰뚫을 수 없는 어려움에 본의 아닌 참여도 하게 된다. 관계란 신비와 정교한 어려움이 얽힌 사슬같아서 지켜볼 수 밖에 없는, 관망을 요구하기도 한다.
아는 사람이 많다는 것으로 위세를 떨치는 분들을 가끔 뵙게도 되지만 너무 많이 알아가려 하는 것도 피곤해질 수도 있음이다. 관계의 끈을 너무 빠듯하게 당기면서 까지 많이 알고 있어야 하는 것도 괴로운 일이다. 너무 덤덤한 것도 문제일 수 있겠지만 과한 관심도 조심스런 일이 되기도 한다. 안다는 것, 알아 간다는 것은 서로 아픔에 함께 슬퍼하며, 함께 기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인데 서로의 기쁨이 서로의 마음에서 흐르지 않는다면, 안다고 하면서도 슬픔을 나눌 수 없다면 아는 관계라 인정할 수는 없지 않을까.
이방인의 삶으로 떠나오기 전 까지만 해도 동네 사람은 다 알고 지내는 것으로 살아왔다. 친족같은 깊은 관계를 대를 이어오면서 유지하며 살아온 시대가 있었던가 할 만큼 따뜻하고 돈독한 어울림이 존재했었다. 안다는 것은 다 나와 같이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현대라는 문명의 파고가 높아지면서 관계의 밑그림도 농도도 천차만별 세분화되어 가고 복잡해져 가고 있다. 이 즈음 시대의 아는 사이와는 차원이 다른 두텁고 촉촉한 정이 있었다. 현대라는 시대로 돌변하면서 예전의 아는 사이 같은 관계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우리 한민족끼리 라도 외롭지 않게 살아가려면 안다는 관계를 어떻게 가꾸며 정립하며 살아가야 할지 마음을 모으고 다듬어 가야 하지 않을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적지 않은 오해와 착오적 시각으로 관계에 금이 가거나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위험을 안고 있다. 오해와 착각은 진실된 관계 정립을 소중히 여기는 데서부터 견제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이나 시안을 보는 시각이 허상을 쫓거나, 진실을 덮으려는 의도된 거짓 상황이 대두되면 진실된 서로를 아는 사이로 이어질 수 없는 입지에 이르게 된다.
상대를 무조건 믿고 이해하려는 사람은 항상 상처받는 피해자가 되기 일쑤다. 함부로 상대를 판단하는 현상은 착오적 시각의 몰이해로 인격에 손상을 가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인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더 심한 경우는 삶의 타격을 입고 일상 유지에도 탄력을 잃게 되고 때로는 대인 기피증 까지 앓게 되는 부작용을 발생하게 만든 사례도 있다. 함께라는 말은 정이 넘치고 따뜻하고 다정한 기류가 흐른다. 함께 한다는 것은 하나가 된다는 연고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가 되면 하는 일도 앞뒤 사정과 까닭이며 모든 내용이 고속 도로를 달리게 된다. 홀로 서기에서 못하는 일도 함께하면 우리가 되고 마음이 맞으면 힘도 갑절로 발휘된다. 함께하면 마음에 거슬림 없이 흐뭇하고 기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타깝게도 기운이 감소되고 손실을 가져오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 나 그 사람 잘 알아’ 하면서 허세를 떨면서도 하나가 되지 않은 상태라면 안다는 사실이 거짓이 되는 부끄러움을 범하는 것이다. 마음이 끌리거나 관심조차 없이 마음 바탕을 올바른 시선으로 살펴보기는 했는지, 관념적으로 눈 여겨 보기라도 했었는지, 근본적인 기초적 관심 조차 아예 있었던가. 의심이 서린다. 소기의 목적을 감추고 다가서는 범상치 않은 일은 배제되어야 하는 일이니까. 해서 누구를 안다는 말은 쉽게 함부로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외로워서 세상살이가 힘겨워서 아는 사람이 필요했고 그리웠던 탓일까. 하지만 사실 아닌 것을 앞세우다 보면 불행이란 사생아를 낳게 된다. 자신을 과시하려는 조급한 마음의 산물은 착각과 실수라는 그물에 걸려들게 되어 있다. 진실에 바탕을 두고 넉넉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사려 깊은 행동이 필요한 무리들이다. 한 때는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한다는 말이 어쩌면 무관심에서 파생된 말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러다 보면 안다는 사람에 대해 가족 관계도 심지어는 신상 문제도 아는 것이 전무할 때도 있겠다 싶다. 서로를 알고 하나가 될 실현성이나 가능성도 없는 경우가 되고 말 것이다. 안다는 것에 부끄럽지 않은 마음의 길을 닦아야 할 일이 숙제로 남게 된다. 하나가 되고 함께 한다는 말은 실로 무겁고 중차대한 뜻을 담은 소중하고 귀한 표현이다. 서로를 안다는 것은 서로를 충분히 잘 알아갈수록 마음까지 함께하는 것이어야 한다. 함께 하면 할수록 반갑고 흐뭇하고 흡족해 지고 행복해지는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지지해 주고 소통되는 사람들만 알고 지낼 수도 없는 일이긴 하지만 지금 까지 서로 알고 지내온 인연으로부터 진정성을 인정받고 싶어진다. 진정성만이 더불어 함께 살아갈 희망의 서광이 될 수 있겠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