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모세(애틀랜타 문학회 회원)
인격의 조화는 영혼의 빛과 내면의 가치를 드러나게 한다.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에서 만나는 신실한 사람들의 정감있는 대화가 부드러운 사랑의 관계로 이어지는 활력소가 되고 있다.
순수한 감정에서 피어나는 맑은 웃음이 있고 격려가 있기에 세속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된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존중하며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의에 충실한 사람을 만날 때는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관점이 아닌 자신(인간)의 관점에 함몰된 균형을 잃은 경직된 사고와 독선과 아집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대할 때이다.
어떻게 자신이 다 옳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인격 분열과 까탈스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의 특성은 인품의 조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훈련이 부족한 사람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통회(개) 자복하며 용서받은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 의를 세워가며 그분의 사랑을 이루어가는 신앙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완전한 믿음의 공동체가 아닌 불완전한 공동체로서 예수 그리스도 사랑의 정신을 닮아가고자 치열하게 기도하며 결단하는 미래 지향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죄의 본성 때문에 하나님 나라 의와 거룩함에 이르는 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사랑과 오로지 긍휼에 의해서이다.
하나님의 의와 선행과 배려, 용서의 마음도 예수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실행 할 수 있는 것이지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없는 한계성에 이르게 되지 않는가?
사도 바울의 탄식(로 7:19)이 곧 자신의 신앙 고백이 되고 있음을 깨닫게 하시는 은혜도 성령의 내주 하심의 역사이다.
인격의 조화와 사람다움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온전한 사랑 안에 거할 때이다.
주님께서 사랑의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시는 은혜에 힘입을 때 타인의 어려운 상황과 고통을 이해하며 긍휼히 여기게 된다.
삶에 내재한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부분까지 서로 헤아리며 사랑의 마음으로 타인을 품을 때 인간관계에서 삶은 아름다워진다.
사랑의 설렘과 선한 영향력이 살아나는 순간 놀라운 삶의 고양된 변화가 나타난다. 이웃에게 다가가는 사랑과 포용의 정신을 말이다.
자신이 변화되며 사랑의 생명력이 성숙 되어가는 역사가 삶을 감동으로 흔들어 놓는다.
이는 인격적 만남의 세계가 있기에 가능하다. 인격의 본질은 사랑과 선이기 때문이다.
감리교 교리적 선언 첫 번째 신앙 고백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 선 미의 표준이 됨을 믿으며”라고 시작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성품(형상)을 주신 것을 닮길 원하는 고백이다.
인간관계에서 친절하고 사려 깊은 행동을 보여주는 사람의 자신감이 넘치는 열정적인 모습이 이러하리라.
일곱 번째 항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된 이 사회를 천국임을 믿으며”라고 고백한다. 기독교 사관에 의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인간을 통해 이루신다는 뜻이다.
성경만이 생명의 말씀으로서 크리스천의 정체성과 삶의 풍요로움을 약속하고 있다.
어떻게 원숙한 경지에 이른 기독교 세계관을 지닐 수 있을까?
참된 최고의 실재이신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우주의 근원과 구원의 본질은 무엇인가?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계획”(제임스 패커)을 알아가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이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기쁘게 하는 것”(웨스터 뮌스터 신앙 고백)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사랑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이는 인격의 조화와 사람다움을 지닐 수 있는 힘(기쁨)이 됨은 물론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건전한 가치관은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참된 의미를 찾게 한다.
성숙한 신앙관은 복음의 감격을 통해 이웃 사랑의 정(헌)신을 배우며 실현하게 한다.
올바른 역사관의 확립과 투철한 국가관은 확고한 신념과 균형 잡힌 사유와 통찰력에서 형성된다. 투명한 재물관 또한 지닐 수 있어야 한다.
그릇된 욕망에 눈멀어 파멸에 이른 사람들이 주는 교훈의 경고를 깊이 생각해야 하리라. 세상 욕망(물질주의)에 휩쓸려 자신을 지키기 쉽지 않은 힘겨운 싸움이 되겠지만 말이다.
고국에서 인격의 조화와 사람다움을 지닌 선량들의 새로운 출현을 위해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