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支泉) 권명오(수필가·칼럼니스트)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이 몇명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대략 250만이란 설과 애틀랜타 한인 인구는 15만이란 설이 있다. 애틀랜타 최초의 한인은 Emory College in Oxford에서 수학한 윤치호(1891년부터 1893년) 선생이었고 그후 본격적으로 애틀랜타에 한인들이 정착하게 된 것은 1970년부터다. 1968년 7월 1일부터 새로운 이민법이 실시된 이후 70년부터 한인들이 계속 미국 이민을 하게된 것인데 그 당시 이민 1세들은 어떻게 하든 억척같이 잘 살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넘쳤다. 그들은 일제 하의 압박과 6.25동란으로 인한 굶주림과 피눈물나는 가난에 대한 세월을 겪은 탓에 이민 온 코리언 아메리칸들은 수많은 역경과 악조건을 물리치고 정착에 성공을 했다.
자영업자들 일부는 경제적인 안정과 부를 누리게 된 탓에 미국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가 됐고 일부 몰지각한 코리언 아메리칸들은 고급 승용차를 타고 골프장을 누비며 지나치게 거드름을 펴 현지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생겼다. 어찌됐든 많은 한인들이 미국에 잘 정착을 했고 심지어 이민 1세가 연방하원의원으로 당선되는 등 미국 주류사회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수많은 교회와 한인단체들이 생겼다.
하지만 호사다마인지 아니면 역사적인 민족의 DNA가 문제인지 시기와 질투와 모략이 그치지 않고 한인 단체와 종교계 내부가 분열되고 양분되는 경우가 많이 발생했고 심지어 동포가 서로 미국법정에서 싸우는 추태를 연출했다. 개인의 특성과 장점도 많은 코리언 아메리칸들이 왜 분열이 심하고 싸워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1975년 가발가게를 할 장소를 찾으려고 인구 3만 이상 되는 도시들을 돌아본 일이 있는데 거의 다 한인들의 가발상회가 있는 것을 보고 놀란 일이 있다. 그 당시 한인들이 경영하는 가발상이 없는 도시에 장사를 시작하면 틀림없이 성공한다는 지인들의 조언을 듣고 또 나는 경쟁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인들끼리 경쟁할 경우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경우가 많이 있고 고약한 사람은 영주권이 없는 동포를 고용하고 임금도 제대로 안 주다가 상대가 항의를 하면 이민국에 밀고를 하는 경우도 있고 또 경쟁상대가 영주권이 없거나 약점이 있을 경우 당국에 신고를 하는 일도 많이 발생했고 참으로 기가 찰 일이다.
개인적인 한인들의 특성은 현명하고 부지런하고 학력도 지식수준도 상급에 속하는데 왜 존경하고 배려하고 단결하지 못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유태인과 중국인, 일본인들은 경쟁을 하면서도 민족과 동포를 위해 합심하고 힘을 합친다.
이민을 선택한 코리언 아메리칸은 새출발을 해야 된다. 조상의 훌륭한 DNA는 이어받고 나쁜 DNA는 버리고 개인보다는 사회를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면서 동포는 물론 타민족과도 손을 마주잡고 미래를 향해 정진하는 것이 Korean American들이 잘 살 수 있는 길이고 영광의 길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