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숙(꽃길걷는 여인·쥬위시타워 보석줍기 회원)
참 오랜만에 불러보는 다정하고 따뜻한 할매, 할머니, 우리 할머니. 내가 ‘할머니’라 불려지는 것이 익숙한 70이 다 된 지금 나는 나의 할머니를 작은 소리로 불러본다.
초등학교 5학년 봄, 학교 가서 삼일절 기념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할머니는 보이지 않고 마당에는 동네 사람들과 친척들이 웅성거리며 둘러 서 있었다. 갑자기 불안하고 놀라 할머니 방으로 들어가니 병풍만 보였다. 너무 난감하여 울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는데 사방으로 흩어졌던 작은 아버지들과 고모가 모여들고 심각한 표정으로 쉬쉬 하는 듯싶었다. 할머니는 홧병이 잦아 허가 없는 시골 병원에 수시로 드나들었다. 할아버지가 자주 외도를 하셔서 할머니는 늘 웃방에서 종이에 담배 가루를 넣어 말아 뻐끔뻐끔 피며 화를 식히곤 하셨다. 그날도 화병이 도져 주사를 맞으러 갔다가 잘못 페니실린 주사를 맞고 충격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법적 대응해야 한다는 작은 아버지들의 의견에 아버지는 조용히 장례를 치르는 것으로 마무리하셨고, 5일장을 치르는 동안 내가 할머니 없이 어떻게 사느냐고 자지러지게 울어대어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슬퍼하던 일이 생각난다. 할머니 품을 독차지하며 살던 나는 할머니가 친척집이나 볼일보러 집을 비우면 밤새도록 울고 징징대었는데, 할머니가 떠나신 후에도 밤마다 훌쩍거리며 할아버지 옆에서 쪼그리고 자다가 할머니 꿈을 꾸곤 했다. 꿈 속에서 할머니가 나에게 쌀쌀하게 대하며 멀리 떠나는 꿈을 꾸다 깨어 섭섭하고 허전한 마음에 잠을 설치던 밤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속상한 일이 있으면 할머니가 더 생각나고, 엄마한테 꾸중을 들으면 이불 뒤집어 쓰고 할머니를 부르며 울었던 사춘기 시절이 필름이 돌아가듯 생생하게 떠오른다. 우리 할머니는 물물교환 시절에 되와 말로 재는 곡식을 넉넉하게 채워주곤 하셨다고 나중에 상인들에게 들었다. 또 과수원을 했던 시절에는 배 수확이 끝날 무렵 동네 집집마다 배 한 바구니씩 돌리라고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셨다.
남편 만나 결혼하고 오랫동안 잊고 살던 할머니… 다섯 손주들에게 ‘할머니’라 불리는 내가 다시 불러보는 나의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 늘 이웃을 챙기며 말없이 다독여 주던 우리 할머니 품은 늘 따스하고 편안했는데 지금 나는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얼마나 닮아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