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모세(애틀랜타 문학회 회원)
얼마 전 향년 97세로 세상을 떠나신 고모님의 인자하셨던 모습이 그리움 저편에 아스라이 떠오르고 있다.
부모 세대의 어른으로서 유일하게 생존하셨던 분이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제 그분의 따뜻했던 정다운 손길도 느낄 수 없고 사랑이 넘치는 음성도 들을 수가 없다.
코로나 상황이라 LA까지 날아가서 조문할 수 없어 가슴이 무너져 내리며 극심한 아픔을 느낀다. 그분께서는 육신이 아닌 사랑의 마음으로 저를 낳아주셨던 분이셨다.
언제나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그분은 어머니 같은 큰 존재였다.
어려울 때 항상 사랑을 듬뿍 담아 필요를 채워 주시고 격려와 용기를 북돋우어주셨던 분이셨다. 이민 생활의 시작도 그분의 사랑의 도움과 은혜로 가능했다.
평소에 대화 중에도 다정하게 등을 토닥거리며 위로와 자신감을 지니게 하셨던 분이 아니시던가.
3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친 할머님과 고모님 밑에서 성장하면서 그분들의 사랑으로 건전한 자존감을 키울 수 있었다.
고모님이 따뜻한 손길로 베풀어 주셨던 사랑의 마음과 맑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있다.
지금 그리움 저편에서 들려오는 영혼의 노래를 듣고 있다.
그분의 그윽한 음성에 실린 베토벤의 우아한 소품 기악곡은 궁정(왕실) 무곡 <미뉴에트>이다.
유년의 추억인 메조소프라노 고모님께서 맑고 부드러운 허밍으로 노래하시던 우아한 모습이 살아난다.
고모님께서 어린 딸(동생)을 품에 안고 머리를 감기시면서 부르시던 곡은 사랑의 <미뉴에트>이었다. 베토벤의 감미롭고 사랑스러운 선율은 유년의 감성을 촉촉이 적셔 주었다.
어릴 때 자연스럽게 클래식 음악을 최초로 듣게(입문하게) 된 계기가 되었지 싶다.
베토벤의 <로망스> 곡을 아버님께서 바이올린으로 연주하실 때 고모님이 풍부한 성량에 허밍으로 노래하시던 황홀한 모습이 감미로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해방 후 이북에서 할머님과 고모님은 어린 동생을 업고 고모부는 저를 업고 어렵게 38선을 넘어 월남해 후암동 뒷산 해방촌에서 살다가 6.25전쟁을 겪게 되었다.
아버님과 신혼이셨던 작은 아버님, 숙모님 큰 고모님께서는 이미 월남해서 서울에 계셨다.
가난했지만 문학과 음악이 있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축복을 감사한다.
문학도이었던 작은 아버님으로부터 한국 순수 문학과 고종 형님으로부터는 심오한 러시아 문학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이제는 한 세대가 떠나가고 자식 세대가 저물어가는 순환의 역사가 대를 잇고 있다.
1924년 일제 점령기에 태어나 격동기의 시대를 살았던 고모님의 삶은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질곡의 삶을 견디어내는 고통과 그 시대의 아픔을 겪어낸 분이셨다.
성악 공부를 시작했던 꿈을 접고 결혼을 하면서 정신대에 강제동원되는 화를 면하게 되었다.
선량했던 남편과 사이에서 1남2녀를 두었고 막내아들은 서울대를 졸업 후 미국에 유학해 우주 과학 분야에서 우수한 박사로 인정받는 귀한 존재가 되었다.
그분의 자식을 위한 희생적인 삶의 헌신이 따랐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
천부적인 미성을 살려 자신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 한이 평생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늘 가슴앓이를 하며 이루지 못한 꿈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했으나 역설적이지만 그 꿈(그리움)을 가슴에 부둥켜 안고 평생을 살았다.
말년은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으로 승화시키는 기쁨을 누리시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최근에는 육신이 불편해 교회 예배를 드릴 수 없어 집에서 찬양의 예배로 최선을 다하며 영혼의 본향(피안)을 바라보는 신앙과 아름다운 삶의 자세를 유지하셨다.
지금 애통함에 가슴을 치고 있지만, 그분의 사랑과 예술혼을 더욱 존경하며 추모한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푸치니 오페라 토스카 중에서) 토스카의 아리아가 아픔의 절정을 이루듯이 그렇게 젊음의 열정과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살다가 떠나셨다.
노년의 삶과 하나님을 향한 기쁨 넘치는 찬양의 모습은 가족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 있다.
오! 사랑하는 고모님 하나님나라 낙원에서 어머님과 함께 안식을 취하시길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