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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아침] 겨울 숲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2-02-18 09:58:29

행복한 아침, 김정자(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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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자(시인·수필가)

                                                          

겨울 숲을 찾아 나섰다. 숲은 황량하고 쓸쓸하지만 고요하고 평온하다. 바람이 배회하는 오솔길을 따라 걷다 문득 올려다 본 하늘도 사색에 잠긴 듯 정적이 맴돈다. 밤새 내린 서리가 햇살에 반짝인다. 해마다 입춘 우수 전후로 찾아드는 영하 추위인데 어찌 다른 겨울보다 유난히 더 추운 것 같은 체감이 아무래도 팬데믹 칩거가 저지른 마음 추위 때문인 것 같다. 바람이 일면 빈 가지들의 난무가 수려하다. 겨울 숲의 질긴 생명력과 비움과 내려놓음의 자유가 유쾌하다. 나목 사이로 비끼는 겨울 햇살이 따사롭다. 팬데믹이 두르고 있던 묵직함까지도 잠시나마 비켜가게 해주는 숲 풍경이  청명하고 눈부시다. 상쾌한 추위가 오히려 색다른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겨울 숲이 안겨주는 편안함 때문인지 오래도록 앓아왔던 향수의 부질 없음과 고향을 잊기로 한 빈 마음에 고향으로 달려가고픈 엇박자 향수가 뒤척인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고향이라 그리움 마저도 접어 두었던 서글픔 속엔 고향을 찾아 나서기엔 무르츰해져버린 풍상도 한 몫을 한 것 같다. 이방 낯선 길을 걸어보지 못한 서투름으로 아릿한 향수를 안고 걷고 또 걸어야 했던 이국의 알량한 삶은 언제나 겨울 숲을 찾게 만들었다. 기회의 나라를 찾아 생소한 이국 공항을 두리번거렸던 단상들이 덩그러니 서 있는 외등처럼 고적했던 이국살이 동안 겨울 숲을 찾곤 했던 그리움은 고운 채색을 덧입히고 있었나 보다.

아치 모양으로 쓰러진 고목을 만났다. 찢어지고 불거진 골 깊은 밑 둥이며 우듬지 가지들, 청청했던 푸른 세월들을 겨울 바람에 묻어두고 속살 훤히 드러낸 그루터기 떨림이 울음 마냥 들리는 건 어쩐지 귀에 익은 희미한 터치 같다. 부메랑 회귀를 꿈꾸며 이국 땅에서 견디어 낸 나그네의 아스라한 족적과 한숨과 눈물이 고스란히 숨 쉬고 있음을 본다. 겨울 숲은 잠들지 않는다는 깨우침이 의외의 선물 인가 싶다. 겨울 숲이 안겨주는 격려로 받아들이려 한다. 겨울이 되면 비로소 알게 되는 것 같다. 겨울 숲의 고요를 만나기 위해 숲으로 가는 이유를. 다 보여 주어도 부끄럽지 않은 겨울 숲의 담담함이 가슴 뻐근한 통증으로 다가온다. 그나마 겨울 숲엔 봄이 숨겨져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겨울 숲이 지켜낸 시간의 모퉁이에서 텅 빈 숲과 마주 하고 있다.

찬 바람이 떠도는 겨울 숲에서 추억 되새김질을 즐기고 있다. 추억은 계절이 바뀌고 꽃잎이 발아래 떨어질 때, 가랑잎이 마음을 적실 때, 겨울 숲에서 마음을 추스르다 슬픔이 차오를 때는 그리움을 되돌리고 싶은 추억의 문 앞으로 다가 선다. 세상살이 파고가 거세게 일면 그리움 메아리 소리도 들리지 않고 세상에 떠밀려 나뒹굴고 있는 그리움이나 추억은 굴절되어 버릴 지도 모를 일이라서 일상의 작은 메아리에도 귀 기울이며 겨울 숲을 떠올리며 살아가리라. 겨울 숲도 가까운 날에 봄 기운이 기웃거리는 새로움으로 변모해갈 것이기에.

나목 가지 끝에 군데군데 남아있는 빈 둥지가 쓸쓸하다. 나무가 생명을 품어 기른 흔적이 겨울로 들어섰기에 드러난 것이다. 비움과 내려놓음을 의연히 감내하고 있는 나목 가지 사이로 숟가락 들 힘도 없을 만큼 육신을 혹사시켰던 영상들이 무량으로 쏟아진다. 환한 햇살 앞 인데도 되돌려 보는 것 조차 머뭇거리게 된다. 모두 내려놓은 겨울 숲 곁에서 끝내 말끔히 비워낼 수 없었음과 쉬 내려놓지 못한 미욱한 선택 조차 숲의 침묵 앞에 부끄럽다. 인간이기에 두껍게 껴입은 겨울 입성처럼 무거운 죄업까지도 겨울 숲의 깊은 속내를 들여다보지 못한 무례는 아니었을까.

계절들은 순환 고리에 필요한 균형을 앞두고 신이 내려주시는 은혜를 입을 채비를 하는데  삶에 매여 아름다운 섭리에 눈여겨 볼 여유조차 없다는 듯 하루하루를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다. 어차피 우리는 자연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생명의 회귀를 거듭하며 태어나고 세상을 떠나는 사이에 흐르는 시간을 우리는 삶이라 한다. 누구나 예외없이 어느 날엔가 삶의 소멸을 맞게 된다. 계절의 마지막인 이 겨울처럼.

빈 가지의 마지막 잎새들이 하나 씩 허물어지고 있지만 왈츠를 연상케하는 무리지어 날으는 새떼들의 비상이 빈 숲을 채워주고 있다. 빈 산을 지키며 들판을 보듬는 겨울 숲 빈 가지 사이로 햇살이 비낀다. 햇살을 한 웅큼이라도 더 받으려는 다툼도 없고 독점도 없고 혼자 배불림도 없다. 모두 하늘 향해 손을 뻗치고 햇살도 바람도 나누고, 풍요도 가난도 함께 나눈다. 미세하게 드러나는 나목의 곡선은 신의 걸작품이다. 헐벗은 것이 아니라 풍요를 위한 절제와 새로운 생명의 요약된 준비에 몰두해 있는 표정들이 신선하다. 겨울 숲에서 만이 만날 수 있는 숲의 풍요를 두고두고 기억 샘에 담아두려 한다. 비움의 숭고와 겨울 햇살의 은어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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