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어떻게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실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궁금증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습니다. 구약시대의 세 인물, <솔로몬, 모세, 에스겔>을 통하여 조명해보면, <솔로몬> – 왕상8: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모세> – 출40: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에스겔> – 겔 9:3,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이 모든 질문을 단숨에 해결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스러운 제자, 초대교회의 사도 중 한 사람인 <요한>입니다. 요한은 <새로운 시작, 로고스 예수>를 요한복음 전체를 대표하여 큰 주제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솔로몬, 모세, 에스겔 선지자는 이미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통해 몸소 체득하였습니다. <새로운 시작, 로고스 예수>의 영적 시각을 통하여예수님은 오늘 이 시대의 우리에게 무엇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실까요? 우리가 매일 눈으로 보고 있는 이 성경말씀입니다. <새로운 시작, 로고스 예수>의 안목에서 우리는 <말씀과 하나님의 관계>를 주목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과 2절이 <새로운 시작, 로고스 예수님>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요1:1절의 “태초에(In the beginning)”는 창세기 1:1의 “태초에(In the beginning)”말씀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태초에”는 성경 66권 전체를 시작하는 <첫 오프닝>의 말씀입니다. 즉, 창세기 1장의 “태초에”는 모든 말씀의 시작입니다. 왜 사도 요한이 <로고스 예수>를 소개하는 첫 말씀을 “태초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했을까요? 그것은”제일 처음의 창조”는 “새로운 시작” “새로운 창조” 임을 알리기 위한 것이 그 목적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요1:4~5를 통하여 창세기 1장에 등장하였던 <천지창조>를 상기시킬 목적으로 “생명”, “빛”, “어두움”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새 창조>를 말씀합니다. 요한복음의 주제는 <하나님의 새 창조>입니다. <하나님의 새 창조>를 주목하면, 첫째도, 둘째도, 하나님은 그 어떤 것에 의해서 결코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새 창조>는 오직 <로고스>를 통하여 이루셨습니다. <로고스>는 곧 <예수님>이십니다. <로고스 예수님, 말씀되시는 하나님>은 태초에 계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로고스 예수님>은 <만유 위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 어떤 것들도 예수님보다 앞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시작”은 곧 “원천”입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이 있게 한 그 <근원>이란 말씀입니다. 성전(Temple)은 두 가지 말씀의 결합입니다. “태초에” 그리고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우주의 뿌리(근원)(“at the root of the universe”)” 요한은 <단순한 메시지> 안에 <하나님의 우주적인 메시지>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요한복음 1장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동사는 입니다.
이 의 가장 적절한 해석은 “영원불변의 진리”라는 뜻입니다. 진리는 영원합니다. 진리는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로고스 예수>란 뜻은 <영원하신 하나님>, <불변의 하나님>, <진리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The Word was in the beginning.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새로운 시작, 로고스 예수>는 이름 그대로 과거의 나, 오늘의 나, 미래의 나를 언제나 존재하게 하는 “The Word”이십니다. “말씀”은 창세전에, 지금도, 영원히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