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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의 세상읽기]아시안 아메리칸의 존재감

미국뉴스 | 사설/칼럼 | 2022-01-28 08:07:41

권정희 논설위원, 세상읽기

구양숙 부동산표정원 융자

권정희 논설위원  

 

80년대 초반 딸이 서너 살 때였다. 너서리스쿨에서 돌아온 아이가 “하하” 웃으며 재미있어했다. 아이들이 자기를 보고 “차이니즈, 재패니즈~” 하며 놀리더라는 것이다. “나는 코리안인 데, 걔들은 그것도 모른다”며 “너무나 멍청하다”고 우스워했다.

 

우리가 살던 곳은 유색인종이 거의 없는 백인동네였다. 피부색 다른 아이는 한 반에 한 둘 정도. 따돌림 받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그런데 백인꼬마들의 놀림에 딸이 주눅 들기는커녕 그들의 ‘무지’를 재미있어 하니 엄마로서는 고마웠다. 백인아이들이 볼 때 아시안 외모면 다 같은 존재일 뿐 차이니즈든 재패니즈든 코리안이든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애써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아시안을 세분하지 않고 하나로 뭉뚱그려 대하는 것은 미국인들의 오랜 버릇이다. 굳이 구분할 만큼 중요한 존재로 보지않는 것이다. 코비드-19 여파로 중국인 혐오기류가 생긴 지난 2년 아시안 전체가 증오범죄의 대상이 된 것이 한 예이다. 어느 민족인지 알아보려는 최소한의 성의도 없는 무관심과 무시의 소치인데, 이는 아시안 스테레오타입과도 상관이 있다. 죽어라 일만 할 뿐 자기주장 내세우는 법 없고, 고분고분 말 잘 듣고 조용한 사람들, 시끄럽게 말썽 피우는 법 없이 근면성실해서 타 유색인종들과 비교되는 모범 소수인종. 주류사회에서 볼 때 아시안은 위협이 되지 않는 존재, 한마디로 만만한 존재였다.

 

2020년 3월 팬데믹 이후 아시안 증오범죄가 급증하면서 아시안 커뮤니티 내에서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이 사회에서 더 이상은 있는 듯 없는 듯, 변두리 존재로 남아서는 안 되겠다는 자각이다. 아시안이 제대로 이해되고 평가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적극 알리자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는데, ‘우리를 보이는 존재로(Make Us Visible)’라는 단체가 대표적이다.

 

뉴저지, 코네티컷, 펜실베이니아, 플로리다 등 주로 동부에서 활발한 이 단체의 목표는 교육을 통한 계몽이다. 학생, 학부모, 교육가, 주의원 등이 힘을 합쳐 K-12 공립교육 교과과정에 아시안 아메리칸 및 태평양 도서출신(AAPI)의 역사와 문화를 필히 포함시키도록 촉구하고 있다. 이미 성과도 있다. 지난해 일리노이와 뉴저지는 미 역사상 처음으로 공립학교 역사시간에 AAPI 역사를 의무적으로 가르치도록 주법을 만들었다.

 

학교에서 특정집단의 역사를 가르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 전달이 아니다. 이 사회에서 누가 중요한 구성원인지를 보여주는 것, 그래서 그 집단의 존재감에 직결된다. 미국역사 교육의 대부분이 백인 이야기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시안은 미국역사에서 거의 거론되지 않는다. 그만큼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왔다는 말이 된다. 학교 수업시간에 다뤄지는 아시안 역사는 중국계 이민이 골드러시를 타고 19세기 중반 시작되었다는 것, 대륙횡단 철도부설에 중국계 인부들이 동원되었다는 것, 2차 대전 중 12만 일본계가 강제수용 되었다는 정도. 드라마로 치면 주조연급 한참 아래 엑스트라 분량이다. 그러니 미국에서 몇 대가 살았든 아시안은 갓 이민 온 외국인으로 인식되고, 미국에서 태어나도 “영어 잘 한다”는 칭찬을 받고, 무슨 일만 터지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막말을 듣는다. 아시안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가 깊다.

 

이민의 나라 미국에서 아시안은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 백인들과는 시작부터가 달랐다. 차별이었다.

 

20세기 중반까지 이민자들은 대부분 해양을 통해 미국으로 들어왔다. 대서양을 건너거나 태평양을 건넜다. 전자는 유럽태생 백인들로 뉴욕 허드슨 강 하구의 엘리스 아일랜드에서 입국심사를 받았고, 후자는 중국인 등 아시안들로 샌프란시스코 만의 에인절 아일랜드에서 심사를 받았다. 양쪽 입국심사대의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지치고 가난한, 자유를 숨쉬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을” 모두 보내라는 자유의 여신상 인근의 엘리스 아일랜드에서 이민자들은 환영을 받았다. 1892년부터 1954년까지 근 1,200만명이 입국해서 20% 정도가 추가심사를 받느라 구금되었지만 하루 이틀이면 대개 풀려났다.

 

1910년부터 1940년까지 30년 간 17만 5,000명이 입국한 에인절 아일랜드에서 이민자들을 맞은 것은 핍박이었다. 1882년 중국인 배제법 등 이민규제로 가능한 한 추방하는 것이 이곳 심사대의 임무였다. 미국 출생자, 남편 혹은 아버지가 미국시민인 자들만 입국이 허용되었다. 대부분 구금되어 짧게는 2주 길게는 6개월, 드물게는 2년 이상 섬에 억류되었다. 기약 없이 갇혀있는 동안 많은 이들은 막사의 나무 벽을 파서 시를 쓰며 추방의 불안을 견뎠다. 그 섬도, 그곳의 부당함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묻혀 진 역사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했다. 아시안이 미국사회에서 핵심 구성원으로 뻗어나가려면 역사부터 살려내야 한다. 이 사회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었고 어떤 차별을 받았으며,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우리도 알고, 미국사회도 알아야 한다. 역사교육이 필요하다.

 

연방의사당, 할리웃, 매스컴, 각급학교 등 목소리 낼 수 있는 곳에 아시안 진출이 늘고 있다. 아시안들은 더 이상 ‘조용’하지 않다. 아시안 아메리칸의 존재감을 높일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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