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희목사
몇 해 전에 뉴욕에 살던 한 코미디언이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시체를 해부용 실험 대상으로 기증하겠소. 특별히 하버드 대학으로 보내주길 바라오. 이것이 내 부모님의 소원을 풀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오. 내 부모님의 평생 소원은 내가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었는데. 내가 하버드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이 길밖에는 없소.”
이 사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죽음은 역시 고통스럽다”는 의미있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은 웃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나 자신에게 죽음이 닥치게 되면 죽음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결코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와 철학과 사상들은 죽음을 미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살 예찬론”까지 대두되고 있지 않습니까? 죽음에 관한 이런 미화는 죽음에서부터 도피하고 싶은 인간 본능의 한 표현 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죽음이 결코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죽음은 슬프고 허무한 것입니다. 죽음은 파괴적이어서 모든 것을 앗아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음을 원수라고 부릅니다. “마지막 원수” 우리가 인생의 싸움에서 최후로 싸워야 할 실존적인 대상이 바로 죽음인 것입니다. 죽음은 사람이면 누구나 맞아야 하는 가장 큰 비극입니다. 그런데 죽음이 비극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이유는 죽음은 필연적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확실한 것입니다. 쟈니 카슨은 우스개 소리로 “미국에서 죽음과 세금 이외에는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라고 했는데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나 신문 보도를 통해서 세금 포탈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중 장부를 써서 기가 막히게 세금을 피할 수는 있을지라도 죽음을 피해 도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쟁이나 사고가 발생하면 “죽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고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죽음의 숫자가 증가되는 것은 아닙니다. 죽어야 할 사람들이 죽는 것입니다. 전쟁이나 사고는 각 사람의 죽는 시기를 앞당길 뿐 결코 죽음 그 자체를 만들어 내거나 새롭게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죽음의 비율을 1:1이라고 합니다. 즉 100%라는 이야기 입니다. 죽음의 확실성은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진리입니다.
둘째 이유는, 죽음은 산 자와 죽은 자를 분리시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철저한 분리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일단 죽으면 그와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땅 속에 묻어야 합니다. 이젠 사랑하는 사람의 환상을 품고 살 수는 있어도 그 시체 곁에 누울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죽음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도 죽음으로 인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부모와 자식이 헤어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가 분리되어야 합니다. 형제들과 사랑했던 오누이들이 나눠져야 합니다. 죽음은 절대절명의 이산 가족을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오라버니의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들 자매는 오빠가 죽기 전에 예수께서 오셔서 오빠의 병을 낫게 해주시리라 기대 했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 그 분이 행하시는 일들을 팔레스타인 지방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 분이 가시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행히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도우심을 믿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오라버니 나사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주님께 급히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야속하게도 주님은 늑장을 부리며 속히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미르다와 마리아에게 죽음 이후에 다시 부활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허망하지만 부활은 새로운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부활의 믿음을 소망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