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많이 행복했고, 많이 아팠고, 많이 인내했던 한 해가 기어코 저물었다. 포부를 품고 정갈하게 비워진 새 캘린더를 보고 있노라면 하루하루 빈 캘린더를 채워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 여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해마다 인류 모두에게 한치 오차 없는 공평한 시간이 주어지고 소양껏 주어진 시간을 낭비하기도 하고 빈틈없이 생을 이끌어내기도 하면서 하얀 백지 위에 부여 받은 생을 주어진 몫만큼 씩 그려가고 있다. 지우개도 연연치 않으며, 딱히 별다른 수긍을 요구하지도 않으면서, 뜻밖의 망설임도 없이 묵묵히 과감하게 그려나갔어야 할 일이었다. 여유없음에서 정성없음으로 마냥 그려넣기만 했던 한 해 그림들을 들여다보면 무엇을 그리려했던지 유구무언이 되곤 한다.
빈틈이 숭숭하든 실속으로 알뜰하게 채워지든 살아온 잔재는 역사 속으로 흘러들고 밝은 기운이 솟구치는 한 해가 시작되었다. 세상은 눈부시게 급변하고 일상의 많은 부분을 전화기로 컴퓨터로 처리하고 연말 연시 선물조차도 온라인으로 처리되고 있다. 손편지 세대였던 아날로그 세대들은 손수 쓴 편지, 카드가 전해주는 따뜻함에 익숙해있기에 이메일로 카드를 대신하고 문자로 새해 인사를 나누다 보면 반갑긴 하지만 감동이 줄어든 것 같은 허전함에 사람 냄새가 그리워진다. 묵은 고정 관념들이며 전통이란 미명 아래 길들여지듯 익숙해진 것들까지 새해엔 서두르지 않으며 꾸준히 덜어내가며 묵은 땅을 일구고 새로운 씨앗을 심고 좋은 열매를 기대하며 남은 날들을 경작해가는 성실한 일꾼이 되어보기로 했다. 절기따라 가꾸고 돌보다 보면 분명히 묵은 상처에도 새 살이 돋을 것이요 과연 살아볼 만한 세상이라며 오랜 지인들과 하이 파이브를 날릴 수 있을 것 같다.
새로운 시작은 끝맺음에서 시작된다. 세모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끝 맺음이었다. 한 해라는 단위가 마치 유효기간 설정인 듯 다음 해로 건너가는 틈새는 여축 없는 간격으로 넘겨진다. 극미세 시간의 흐름이 때로는 삶을 짓누르고 절박함으로 밀어붙이기도 하지만 새로움을 기대하게 하고, 초조한 무기력과 의기소침을 일깨우는 자극제가 되어 주기도 하며, 마냥 여백 없는 세월임을 탓하고만 있을 수 없음이라 일깨워주기도 한다.
떠나보내는 아쉬움과 맞이하는 기대감이 교차되는 송구영신 길목에 서면 헤아림의 정산이 가지런히 정돈 되었는지 살펴보게 된다. 가재도구, 옷장, 책상 서랍이며 책 읽기와 사색을 위한 산책까지, 심지어 관계의 정립까지도. 한 해를 살아온 잔재는 미흡하기 이를 데 없지만 반성이 도출해낸 참회 과정은 자존감 회복에 일조해 주었고 삶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세월의 향기로 발효되고 있었던 것이다.
떠나버린 한 해 앞에 면구스러움이 앞을 가리고 후회와 미답이 둔덕을 이룬다. 작심삼일도 등장하고 떠나보낸 소중한 시간 앞에 자책과 존재의식 조차도 불편하지만 지난 해의 이룸과 실패에 집착하지 말자. 새해에는 새해의 해가 다시 떠오르고 새해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것이니까. 지난 아픔과 상처는 비워내고 선한 것으로 채우며 새해로 들어서자. 비워야 내 영혼이 살아날 수 있다. 그 비움의 자리에 꿈과 비전으로 풍성한 은혜가 은밀하게 채워질 것이다. 순간순간을 구사해온 편린들이며 일상들을 각고로 다듬어온 글 조각들을 이생의 옹골찬 글모음으로 남기고 싶다는 아우성이 온 몸과 마음을 이토록 달뜨게 할까.
날마다 새해를 맞듯 하루 하루들을 그려 넣으며 평온이 숨쉬는 날렵한 획을 그려 보리라. 잊지못할 풍경 앞에서는 한 폭의 수채화로, 어느 계절엔 유화풍의 터치로, 안개 자욱한 날엔 수묵화로, 어느 여행지에선 서양화로 365일이라는 긴 두루마리에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가리라. ‘인생이 길면 얼마나 길 것인가” 모든 인생은 날마다의 긴 여정을 계속 걸어가고 있다. 잘 살아냈는지 잘못 살아가고 있는지 득실을 따질 연유도 없어 보인다.
모든 인생들이 가는 길은 같은 곳을 향해 가고있기에 나태해진 지성은 버리고 가능하면 다 품고, 좋은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자. 베풀 줄 알고, 잘잘못을 너그럽게 보아줄 줄 알아서 넓은 아량을 지닌, 시원스런 큰 마음씨로, 도량 있고 슬기롭게, 관대한 넉넉함으로 날마다의 하루들을 새해맞이처럼 모색해야 할 일이다. 송구영신 건널목에서 결연의 옷을 입고 작심이란 외투까지 단정하게 겹으로 입으며 예절을 갖추고 새로운 한 해를 맞으려 한다. 매일 매일의 하루들을 새해 첫날처럼 생기 있는 걸음으로 선명한 족적이기를 다짐하면서.
임인년 새해가 열렸다. 이 광활한 미국 땅에서 한인사회 입지를 굳혀가며 소수민족으로써 자신감 넘치는 열정으로 힘있게 달려가는 호랑이처럼 대형 화폭을 만들어 갔으면 한다. 호랑이 해를 무색하게 하지는 말았으면 하는 도모를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