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오래 전에 가까이 지내셨던 분을 한인마트에서 우연히 기적처럼 만나게 되었다. 긴 세월 만나뵙지 못했던 동안 큰 수술을 하시어 이젠 완치되셨다고는 하셨지만 어찌 눈 빛은 나목이 즐비한 황량한 들판처럼 스산함이 맴돌았다.
서른 다섯해 전에 처음 그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어찌 그리 한 번도 오가며 스치는 일 조차도 없었을까 어이없는 마음인데 ‘큰 수술을 한 후 바깥 출입이 불편해지고 자연스레 외출을 자제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나 보다’고 하시면서 오히려 민망해 하시었다. 고통, 절망, 상처와 시련이 더 낮은 모습으로, 다감하고 친밀한 모습으로 이끌어 주었나보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셔서 다음을 약속하자고 했더니 ‘또 언제 쯤에나 만나게 될까요’ 헤어짐의 짧은 멘트가 큰 동굴 속에서 울려오는 음울한 메아리 같이 며칠을 지났는데도 귓전을 맴돈다. 새해가 들어서기 전에 전해주고 싶었던 마음을 전해야겠다. 서로, 함께, 더불으며.
새해에는 어색하고 조금은 남새스러워도 ‘사랑한다’고 알려주고 눈물이 고이면 감추지 말아야지, 마음을 다 보여주지 못한 안타까움도 줄여가면서 후회 없는 추억을 만들어 가야지. 눈만 감아도 보고싶은 사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분들은 신물이 날 정도로 열심히 만나야겠다. 관계를 저울질 하시려는 분들은 만나도 그만 안만나도 그만인 라인으로 모셔두기로 했던 것도 이 또한 허접한 부끄러움이 아닐까싶다. 밝은 새해가 다가오고 있는데.
신축년 마지막 저녁에 지는 해와 임인년 새해 아침에 떠오른 해가 묵은해와 새해로 구분지어 주기는 하지만 새해라해서 유난스럽지는 않으려 한다. 내일도 어제와 같은 오늘일 것이니까. 평범한 일상을 지향하려 한다. 시작은 비장했지만 마무리 무렵이면 치열했던 만큼 아쉬움도 밀려들었으니까. 하루들이 한뼘 차이도 아닌것을.
새해엔 어떤 인연의 끈 하나가 보태지려나. 어떤 추억의 하루가 기억으로 남겨지려나. 어떤 목표가 마침표를 찍어 주려나. 견인해내지못했던 날들에게 후한 인내의 상을 안겨주는 일에도 서로, 함께, 더불으며 일구어 가고 싶다.
세상과의 싸움에서 빚진 자로 자처하며 스스로 실격당한 자로 홀로 세상과 맞서려는 이단아가 되어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는 분들을 뵙게되면 딱하고 안쓰러움이 인다. 필자처럼 그리 착하지 않아도 된다고, 빈틈 없는 최고의 사람이 되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 만든 기준치에 도달하지 못해 지쳐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자고, 세상 가운데서 하나의 개체라는 이유 한가지 만으로도 존재가치가 충분하다고. 나 또한 완벽을 추구하고 최상의 것을 모색하고 세상 기준치를 향해 허덕이느라 시간을 낭비해왔던 푼수 경험이 있었지만, 내가 나를 사랑하고 보듬어 주기로 마음을 다지고부터 타인의 상처가 더 커 보이고, 그들의 신음이 제대로 들리더라는 것이다.
올 한 해도 내 모습 이대로를 간직하는 일만으로도 벅찼던 한 해였으니까.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려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에 힘들고 어려워도 아직은 살맛나는 세상이라 믿고 싶다. 해서 세상을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했나보다. 더불어 살아야 살맛나는 세상을 연출하기 쉬워질테니까. 울타리 없는 조화로운 세상을 꿈꾸다가 차라리 두 눈을 꼭 감고 세상을 마주해야 할 때도 있다. 쓸쓸해서 혼자가 싫어 사랑을 나누고, 사람을 만나야하는 것이 인생이라서 사람을 바라보기만 해도 눈물이 날 때가 있다.
모든 인생이 지닌 공통점 중에 후회 없는 생은 없다고 했기에 새롭게 단장한 달력이 펼쳐낼 우연이며 기발한 행운이나 기적보다 지상에서 남은 날 동안 건강한 하루들이 열려지기를 바램하는 마음이 된다. 서로 추구하는 가치관과 가는 길이 다르기에 주관적 만족감이 행복 잣대로 적용되고 있기에.
행복해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이미 내 안에 있는 행복이 오히려 숨막혀 하지는 않았을까. 만일 행복이 깃대에 높이 달려 펄럭이고 있다면 누구랄 것 없이 깃대로 기어올라갈 것이다. 행복이란 평범한 삶 속에서 예나 지금이나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오늘도 행복을 찾아 힘든 삽질을 계속하는 분들이시여 행복은 짧고 하루는 늘상 길었기에 행복을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할 일만 남아있네요.
새해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장 아름다운 삶의 자태로 받아들이려 한다. 세상은 서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곳. 너와 내가 만나서 가족 울타리를 만들고 함께 모여 살아간다.
할배가 되고 할멈이되어 함께 사는 여기가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띠를 두른 성역이다. 아름다운 세상, 살맛나는 세상은 서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다. 밤 기차가 먼 기적소리를 흘리는 깊은 밤이다. 새해가 기적소리처럼 은은하게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