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쉐임(םש Sheim)”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단어입니다. 그 이름 임마누엘 예수를 사도 마태는 함축적으로 잘 묘사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예수라는 이름과 임마누엘이라는 단어 속에 잘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사야는 사 7:14에서,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예언한 것을 사도 마태를 통하여 언약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진리의 사실성을 증명하였습니다. 2000년전의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21세기의 팬데믹시대에도 여전히 우리 곁에 계시면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즉 “구주(Redeemer)”로서 이 험난한 역사를 힘차게 잘 이끌어가고 계십니다(마1:21~25).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입니다. 이름은 곧 그 사람의 생애의 흔적입니다. “구주매화발 계행죽엽성(狗走梅花發 鷄行竹葉成)” 개가 달려간 자리마다 매화꽃이 활짝 피어있고, 닭이 지나간 자리마다 대나무 잎이 무성하다는 시인의 노래처럼 예수님의 두 이름, 임마누엘 예수 즉 우리와 늘 함께 계시면서 이 땅의 온 인류 즉 우리 모두의 죄로부터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구주이십니다. 탄생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첫 단계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도다”(빌 2:7~8) “쉐임”이란 히브리어 단어처럼 <이름의 묵시적 의미>는 희생을 수반하고 헌신의 열매가 동행할 때 비로소 그 가치를 발할 수 있다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결코 화려한 왕궁에서 호의호식하는 모습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내려놓으심으로써 우리의 완전한 구원을 이루시게 된 것입니다. <캐롤송과 백화점의 화려한 쇼윈도우>에 장식된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요란분주한 그런 외형적 화려함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 예수님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의 걸어가신 그 자리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야훼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며,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61:1~2) 선지자 이사야는 이 모든 예수님의 생애를 한 마디로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 압축하여 메시야 그리스도의 생애를 이름하였으며, 사도 마태는 “예수(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구주)”라 이름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이름에 대해서 책임지고 있습니까? 나의 이름이 이 세상에 남기고 갈 흔적의 대명사라면 나의 이름에 대해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떳떳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은 <임마누엘 예수의 이름>을 그대로 본 받은 모습 즉,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 “성도”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둠을 밝히고 맛을 내며 세상과 구별된 진정 <나실인>의 모습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