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支泉) 권명오(수필가·칼럼니스트)
1973년 월남전이 끝난 후 미군부대에서 일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귀국해 직장을 잃고 있을 때 미국 취업이민 길이 열렸다. 그 당시 미국은 특수한 과학자들이나 의사, 간호사 및 문화 예술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우선 순위로 이민을 받아들이고 그 다음 미국이 필요로 한 직종인 미용사, 정원사, 병아리 감별사, 가구 기술자와 시트공, 자동차 정비와 바디공 등 수많은 직종들이 대상이 돼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직종을 선택해 취업이민 신청을 했다. 그 중 나도 하나였는데 특수 직종이나 자격증이 있는 사람들은 생활이 안정됐으나 일부 취업 이민자들은 미국에 도착후 직장을 잃게 됐고 또 수입도 적어 무엇이든 해야 했고 또 불법으로 미국에 정착한 사람들은 직장을 구하기 힘들어 위험한 우범지대에서 일을 하거나 사업을 하게 됐다.
1973년부터 1993년 사이 수많은 한인 1세들이 강도들의 총탄으로 희생되는 비극이 발생했다. 74년 볼티모어에 도착했을 당시 친구 아들이 7-11에서 일을 하다 강도에 의해 희생됐고 뉴욕 할렘가에서 친구형이 강도와 격투를 하다 희생되고 미국 대도시에서 수많은 이민 1세들이 강도들의 총탄에 무참히 희생됐다. 애틀랜타에서도 그동안 한인들이 많이 희생됐다. 1986년 웨스트앤드 인근에서 식품점을 하던 이용만씨가 강도에 의해 희생됐는데 그당시 애틀랜타 컨스티투션 신문에서는 한인 식품점 강도 사건이 30건 이상인데 신고된 것은 2건 밖에 없다고 했다. 이유는 언어 문제와 또 잘못 신고를 하면 더 큰 화를 당할까 바 두려워 신고를 기피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때문에 강도들의 표적이 된다고 했다. 나도 루이지애나에서 장사를 할 때 피해를 당했는데 경찰이 범인을 어떻게 했으면 좋으냐고 물으며 만약 처벌을 원하지 않을 경우 더 큰 피해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충고해 법대로 처리하라고 한 일이 있다. 1989년 애틀랜타 식품점에서 송학수씨 부부가 강도의 총탄에 살해된 사건이 발생해 한인사회 지도자들이 시 당국과 경찰국에 항의와 대책을 요구했고 필자도 장례식에 참석해 오열하는 가족들을 위로하고 한인들과 함께 슬픔과 울분을 토했다. 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강력하게 대책을 세우자고 열들을 올리고 헤어졌는데 일주일 후 아무 소식도 없이 또 다시 무책이 상책이 되고 말았다. 나는 장례식을 다녀 온 후 합동 위령제나 위령탑을 세우자는 칼럼을 기고했다. 어떤 방법으로든 안전하게 살 길을 찾고 비극의 역사를 미국사회에 알려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민 1세들이 열심히 일하다가 억울하게 희생된 비극이 흔적없이 사라진 것이 원망스럽다. 1973년부터 1993년 사이 애틀랜타 인근에서 강도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50명 이상이고 미 전국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은데 지역 한인회와 미주총연합회 등 그 어디에도 기록조차 없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지만 역사는 기록되고 후세들에게 전해야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