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마지막 마침표는 에베소 교회에서 시작하여, 서머나, 버가모를 지나 시계 바늘 방향으로 두아디라를 가고 있습니다. 21세기의 교회를 향하시는 예수님의 메시지가 이 두아디라 교회의 현상을 통하여 공감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성장과 부흥>이 건강한 교회의 정상적인 현상이라면,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여 칭찬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보면,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이 사실만 본다면, 두아디라는 건강한 교회의 긍정적인 모습으로 가득한 교회입니다. 21세기의 오늘날 현대교회가 지향하는 장점들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두아디라의 이름처럼 “성읍(Castle Town)”에 위치하여 방직, 염색, 기타 수공업”으로 왕성하여 당시의 시장경제가 원활한 ‘중소도시(Metropolitan City)’입니다. 즉 외적 현상으로는 ‘신앙과 경제’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그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산업도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도시구조와 교회구조>가 흡사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 안에 ‘이세벨’로 불리는 음란한 여선지자의 <이방 제사와 음행을 용납>하는 자들이 있어 엄하게 책망을 하십니다(계 2:20-21). 구약시대의 이세벨은 시돈(페니키아)왕 엣바알(바알 제사장)의 딸입니다. 왕상 16장~19장에 등장하는 이세벨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7대 왕인 아합(BC 874-853)의 아내가 된 여자입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왕상 16:31). 이 말씀처럼 이세벨은 <가증스런 우상 숭배자>입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 가장 잔인하고 타락한 여인으로 지탄받고 있습니다(왕상 21:5-16, 나봇의 포도원 탈취사건(불량배 두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강압하여 돌로 쳐 죽인 사건). 이세벨의 정체는 왕하 9:22이 단적으로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요람이 예후를 보고 이르되 예후야 평안하냐 하니 대답하되 네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하더라.”
음녀 이세벨의 적나라한 정체는,
① 먼저 그의 남편 아합을 <맹신적인 바알 숭배자>로 만들었고,.
② 이스라엘 내에 <음란하고 부패한 바알 숭배를 권장>했으며,
③ <850 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포섭하여 조종>하였고,
④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살해>했으며,
⑤ 갈멜산 전투에서 패배한 후 <엘리야를 죽이려는 계략을 꾸민 여자>입니다(왕상
18,19).
요한계시록 2:18~29에 등장한 <이세벨과 그의 추종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혹하는데<가장 큰 무기는 음행>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음행에 빠진 성도들에게 <회개하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물론 구약의 이세벨이 살아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벨이 행한 것이 구약의 이세벨과 닮았다고 그 이름이 별명처럼 붙게 된 것입니다. 그 두아디라의 이세벨은 오늘의 교회에서도 종종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두가 경계해야 합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나타난 이세벨은 호된 책망을 받은 이후에, 오늘날에 와서는 아주 미미한 흔적뿐입니다. 이것은 다시 한 번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들입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전개했어야 했던 것은‘회개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는’<영적 대각성운동>은: 첫째로, 철저하게 거듭남을 위해서 통절한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것으로부터 180도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탄의 깊은 것을 성령 충만으로 무장된 영적 통찰력으로 분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21세기의 모든 교회를 향하여, 직접적으로는 영적 대각성운동을 감행해야 할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여 예수님의 간곡한 당부는 이것입니다.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24-25절). 굳게 잡아야 할 것은 가장 중요한 십자가 위에서 전부를 내어놓으신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내어 놓으신 것처럼, 21세기의 오늘을 사는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마라나타 예수가 다시 오실 그날까지 굳게 잡아야 할 것은 <생명을 다하여> 교회를 지키는 것입니다.
교회는 곧 희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