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새해와 섣달이 맞물린 세밑이다. 깊은 밤 먼 기적소리를 들으며 지난 한 해를 돌아보게 된다. 잘 살아온 걸까, 잘 살고 있는 걸까,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열심히 살고 있으면서도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일까. 순간순간 마음에 청진기를 대보게 된다.
한 해를 떠나 보내야 하는 연말, 때를 따라 알곡같은 결실로 충만한 한 해를 보냈다면 추수를 끝낸 농부처럼 뿌듯할 것이다. 다사다난 우여곡절은 좋은 결과를 안겨주기도 하였고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도 해주었다. 가치있는 일들을 만나 보람으로 삼을 수 있는 결실을 얻기도 했다. 기쁨에 겨운 환성도 있었고, 감회, 뉘우침, 각성도 있었다. 후회 없는 삶이란 없다고 했기에 엄청나게 부끄러운 일이나 나쁜 일을 하지 않았다면 열심히 잘 살아왔구나 하며 스스로를 인정해 주어야겠다. 지난 날들을 돌아보는 노심의 초조한 긴장감을 오히려 애잔함으로 어루만져 주기로 했으니까. 한 해 동안 삶의 모든 것 위에 다스림이 있는 인생이고자 무던히도 고투하고 애썼던 기억들이 뭉게구름처럼 몰려든다. 언젠가는 다 두고 떠나야 할 인생인데 어떤 용서인들 못하겠으며 아무리 어둡고 암담한 시간 틈바구니에 끼어 있다 한들 영원을 향하고 있는 나그네 길인 것을.
‘이 또한 지나가리라’하노라면 평온이 다가오기 마련이었던 시간 곁에는 다스림 충언이 맴돌고 있었다. 이 땅에서 살아내야 할 동안의 다스림 또한 새 하늘, 새 땅을 만날 그때가 되면 한 줄기 바람처럼 육신을 떠나게 되는 것이 아니던가. 생의 분량에서 남은 날들을 더 겸손하게 가일층 심도 높은 다스림을 위해 조심성있는 행보를 구축해 가야 할 것이라 다짐하게 된다. 떠나 보내는 한해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잘 살아온 것일까라는 질문 앞에서 하위권에서는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잘 살아왔다는 자부심이 있어야 잘 살아갈 수 있을 터인데.
과연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마치 왜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으로 변절될 수도 있음이요, 답을 붙들고 있을수록 흡사 목적 없는 삶을 향한 질문으로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음이라서 상대적 압박감을 받기 십상이다. 악순환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질문을 우회적으로 바꾸고 싶은 것은 삶의 의미나 추구해야 할 가치에 명확하고 일관된 우선순위를 나열해야 할 것 같은 답을 내놓게 될 것인데 과연 그 답을 정답으로 세워주기 위해 잘 살고 있다는 반증을 재구성해야 하는 의무감의 무게를 과연 감당할 수 있을 것이며 진솔한 해답에 걸맞는 명실상부한 삶의 모습을 책임질 수 있을까.
정들었던 묵은 해와 헤어져야 하는 세모라 바람직한 마무리로 정산해야 할 것 같은 망설임에 젖어 있는 나이든 아낙의 견해에 비해 세상의 급하고 격렬한 움직임이 가히 충격적이다. 모든 기준이 급격하게 바뀌어 가고 있다. 아날로그 시대를 건너 온 세대는 남다른 지식과 평범한 사람들이 갖지 못한 경험에 인품까지 훌륭하면 고매한 분으로 인정받기에 충분했는데 디지털 시대의 모티브는 인격과 품성과는 무관한 흐름으로 흐르고 있다. 지식과 정보는 컴퓨터에서 무한 공급을 얻어낼 수 있지만 지나친 정보 홍수에서 정확하고 바른 정보 선택을 위한 해안을 키울 수 있어야 하는 시대로 바뀌었다. 얻어진 정보만으로 얼마든지 멋지고 신나는 생을 살아 갈수 있을 것 같은데, 세상은 구태의연한 멋진 생을 추구 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한다. 이미 평범함을 추구하는 시대로 접어 들어 유난한 도전이 요구되는 삶보다 평범함을 선호하는 길이 호응을 얻게 되었나 보다. 나이를 더해 갈수록 평범을 유지해 간다는 것은 난해하고 힘겹다는 사실과 직면하게 되는 시대로 돌입했다.
평범이란 수식어 앞에서는 무난하고 범상한 것으로 수월할 것이라는 선입견으로 쉽게 생각하게 된다. 평범을 선량하다고 자부하기에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농후한 것인데. 주어진 상황에 따라 ‘조건 값’을 따라 행동하게 되는 것이라서 어쩔 수 없이 평범함을 스스로 거부 하는 꼴이 되고 만다. 현실의 냉혹함을 미처 맛보기 전이라 화려한 꿈을 안고 패기에 부풀어 있을 무렵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노년에 이른 지금, 불안하고 고달픈 세상을 평범으로 착각한 사람들이 만들어 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자신과 가족을 ‘유토피아’ 로 인도할 수 있다면 언제든 죄책감 정도는 저버릴 수 있는 세상으로 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 하나만이라도 티끌 같은 마음일지라도 꾸준히 심상한 평범을 추구 하노라면 평범한 행복 속에서 잘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꿈을 가져본다. 새해에도 예사로운 평범을 추구하며 하루하루 ‘잘 살고 있는 걸까’ 질문을 던지며 남은 삶을 지켜가려 한다. 한 해 동안 미흡한 글을 읽어 주신 독자님들께서도 행복한 송구영신이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밤낮 없이 노심초사 한국일보를 만들어 가시는 제위 모든 분들께도 새해에도 하시고자 하시는 일들을 성취하시며,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HAPPY NEW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