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모세(고전 음악·인문학 교실)
가을이 저물어가는 스산한 숲길에서 내면으로부터 떠오르는 깊은 생각을 삶에 올바로 적용할 수 있을까?
낙엽 흩어지는 황량한 들판의 세월이 흘러가는 흔적은 인생의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생각게 한다.
“인생은 움직이는 그림자에 불과하도다. 인생은 소란스럽고 분노에 차 있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이 바보가 지껄인 얘기다,” (세익스피어의 작품 “멕베스”의 비탄)
완전한 삶을 살 수 없는 자신의, 연약함의 독백이지만, 고통받는 맥베스의 고귀한 인간성을 나타낸다. 우리 삶의 의미와 죽음의 신비로움에서 찾아야 할 영적인 여정의 교훈을 말한다.
“죽음을 생각해 보면 삶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죽음과 친숙해지면, 매주 또 매일 선물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가 조금씩이라도 삶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삶은 소중해지는 것이다.”(알베르트 슈바이처)
죽음을 직시한 상반된 견해에서 슈바이처의 삶의 긍정에 마음을 두고 싶다.
“삶 전체를 통해서, 사람들은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삶을 통해서 죽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세네카)
삶에서 죽음을 배우고 죽음에서 삶을 배우는 역설(Paradox)은 인간의 한계상황과 생사관의 깊이를 더해 주리라는 생각이다.
어느덧, 삶의 계절에서 늦가을을 맞는 자신의 모습은 자연의 질서에 속한 존재임을 발견한다.
지금 노년의 삶의 의미를 새롭게 할 바람직한 자세가 지혜에 이르는 길이 아닐는지.
삶의 계절 가을을 고찰하는 탁월한 교훈이 될 수 있어야 하리라.
지난날 삶을 반추하며 자신의 열정적이고 성숙함으로 발돋움했던 시절도 자연의 질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노년의 삶에서 이내 다가오는 겨울은 어떻게 맞을 수 있을까?
삶의 계절 겨울을 맞게 되면 얼마 남지 않은 삶에 대한 애착에서 새롭고 뜻있는 일들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짙어진다.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의식은 영적으로 고양(승화)되는 삶의 변화를 이루어 낸다.
호흡이 있어 살아가지만, 정신이 죽어있는 자가 있고 죽었지만, 인간 삶 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자가 있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호흡이 있는 존재이지만, 영적으로 죽어있는 삶의 실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죽을 목숨이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 안에 있다.
죽음 자체가 영생을 빼앗아 갈 수 없다. (고전 15:54)
위로와 소망이 되는 영적인 귀한 말씀을 받아들인다.
인간에게 주어진 물리적 시간을 Chronos(차안:此岸)라고 한다면 Kairos(피안:彼岸)는 영원한 신비의 시간이다.
죽음은 “크로노스”에서 “카이로스”로 옮겨지는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
새로운 생명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적 세계인 “카이로스”에서 새로운 삶이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노년의 삶은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은혜의 시간 앞에 선 존재이다.
노년의 삶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강인한 의지력으로 참 생명력의 경이로움을 찾는 지혜의 적용이 있어야 한다.
노년의 삶에서 자신의 소망이 분명히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다.
“자주 많이 웃을 것, 현명한 사람에게 존경받고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것, 아름다움을 헤아릴 줄 알며 타인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날 것, 자신이 살아있음으로 단 한 사람의 삶이라도 행복해지는 것,”이라는 미국의 시인(사상가)이며 목사인 “랄프 왈도 에머슨”(링컨 대통령 장례식 때 추도사를 낭독했음)의 시에서 나오는 진솔한 내용이다.
노년의 삶에서 진정 무엇을 소망해야 하는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충언이다.
노년에 자신의 삶 자체를 진실하게 받아들이고 사랑의 열정으로 남은 인생을 헌신해야 하리라. 노년에 생명력을 추구하는 활기찬 삶은 사랑의 열정과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다.
늦가을(만추:晩秋) 저녁의 숲길에서 갖는 노년의 삶의 소회(素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