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한인 이민 120주년 대기획 한인 이민선 겔릭호의 항로를 가다
1903년 1월13일.
조선왕조 말기 대한제국 시절 102명의 한국인을 태운 미국 상선 겔릭호가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한지 21일만에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올해로 120주년을 맞는 미주 한인이민사의 시발점이었다. 그중 일부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고된 나날을 견뎌내면서 하와이에 남았고 일부는 새 삶을 찾아 LA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척박한 땅을 일구며 이민의 삶을 시작한 한인 이민 선조들의 이민사는 파란과 질곡의 가시밭길과 감격과 환희의 길을 걸으며 써온 드라마틱한 불멸의 대서사다.
올해 뜻깊은 한인 이민 120주년을 맞아 자랑스러운 이민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들의 고난과 희망의 여정을 되새기고 기억하기 위해 이민선 겔릭호의 길을 거슬러 항해에 나서는 담대한 도전이 펼져진다.
미주 한국일보는 한인 이민 12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겔릭호 항해의 길을 다시 밟는 미주 한인요트클럽 남진우 회장을 비롯한 항해팀을 후원하며 그들의 대장정과 함께 한다.
“강에서 산란한 연어는 치어 상태에서 강에 살다가 바다로 내려갑니다. 한동안 바다에서 살던 연어는 알을 낳을 때 태어난 곳으로 거슬러 돌아오죠. 미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아마도 제게는 거역할 수 없는 ‘회귀본능’이나 ‘귀소본능’이 있는 듯 싶습니다.”
‘미주 한인요트클럽’ 회장 남진우(62)씨가 이끄는 3인의 원정대가 2월 말쯤 LA인근 마리나 델레이를 출발, 이민 선조들이 미국 상선에 몸을 실었던 인천까지 대항해에 나선다. 총 항해 거리 8만여 마일에 두달 반 정도가 소요되는 말 그대로 ‘대장정’이다. 미주 한인으로는 1990년 당시 UCLA 재학생이었던 강동석씨에 이어 두번째 태평양 횡단 도전이다.
남진우 회장은 1960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79년 LA로 이민 와 라구나 칼리지 오브 아트 & 디자인에서 회화를 전공한 예술가다. 2007년부터 취미로 목선을 만들기 시작했다. 목선을 만들다 보니 배가 움직이는 원리에 관심을 갖게 됐다.
마리나델레이와 롱비치 등 바닷가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요트를 보며 호기심을 키웠다. 2011년 무턱대고 1988년도에 제작된 중고 요트를 구입했다. 요트의 선명은 이그나텔라(Ignatella). 남 회장에겐 무엇보다도 소중한 애마와 같은 존재다.
요트 제작업체 타야냐에서 만든 이그나텔라는 길이 37피트, 중량 3만2,000파운드 대항해용(blue water) 선박이다. 사이즈는 중간이지만 중량이 무겁고 안전성이 높아 대양 횡단에 자주 사용된다.
2013년 요트에 관심이 있는 한인들을 모아 한인요트클럽을 결성했다. 한인으로선 드물게 연방 해안경비대에서 발행하는 선장 자격증도 갖고 있다. 그에게 요트를 배워 자신의 전용 요트를 구입한 한인들도 제법 된다.
“강동석씨 용감한 도전에 큰 자극”
빠듯한 예산은 고민…‘고펀드미’ 모금 계획
한반도 평화무드가 한창이던 지난 2017년 남북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차원에서 태평양 횡단을 처음으로 계획했다. 이후 한반도 상황이 냉각되면서 미 시민권자의 북한 여행이 금지되자 계획을 접어야 했다.
“같은 해 태평양 횡단 연습도 할 겸 롱비치에서 시애틀까지 요트를 타고 단독 항해를 했습니다. 맞바람에 맞서 고된 항해를 견뎠죠. 결국 70일만에 왕복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2017년 계획은 무산됐지만 태평양 횡단의 꿈을 포기할 순 없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차근차근 준비를 시작, 이민 120주년에 맞춰 재도전하기로 결심했다.
5만달러의 사비를 들여 돛과 엔진, 배 밑바닥 등을 교체했다. 풍력 발전기와 솔라 발전기도 새로 달었다. 단독항해는 아무래도 무리일 듯 싶어 함께 원정에 나설 한인들을 찾았다. 인천 출생으로 남 회장과 함께 요트를 타는 도 유씨가 제일 먼저 합류했다. 지인의 동생인 박상희씨가 2월 초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 와 대항해를 함께 하기로 했다.
“무역풍이 뒤에서 밀어주는 태평양 횡단은 맞바람과 싸워야 했던 시애틀 왕복보다 더 수월할 것”이라고 남 회장은 기대하고 있다.
남 회장을 비롯한 원정대는 일단 출발일을 2월25일 토요일로 잡았다. 태평양을 횡단하기에 비교적 수월한 시기가 1월 초부터 3월 말까지이기 때문이다. 항해에 앞서 꼼꼼히 챙겨야할 준비사항이 많지만 늦어도 3월4일에는 출항할 예정이다.
일단 요트가 정박해 있는 마리나델레이를 떠나 바하 캘리포니아 끝자락에 위치한 로스 카보스까지 내려갈 예정이다. 이후 서쪽으로 항로를 돌려 한인 이민사가 시작됐던 하와이로 향한다. 여기까지 거리가 대략 2,400마일이다.
하와이에 도착하면 한인 이민자들의 땀과 눈물이 서린 사탕수수 농장도 방문하고, 한인 이민사와 관련된 여러 사적지도 둘러볼 계획이다. 하와이에서 3,900마일 정도 떨어진 괌이나 사이판 중 한 곳도 들리기로 했다.
마지막은 최종 종착지인 인천으로가는 항해다. 괌이나 사이판에서 인천까지는 1,800마일 거리. 어차피 오키나와 해협을 지나쳐야 하기 때문에 정박까진 못하더라도 고베항 근처까지는 가보려 한다.
남 회장은 “한국에선 먼저 부산항에 입항한다”며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라 감회가 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후 남해안 다도해를 둘러보며 서해안을 따라 서서히 북상, 최종 목적지인 인천항에 도착하면 두달 반에 걸친 대장정은 마침표를 찍게 된다. 한달 반 남짓 남은 기간 동안 준비해야 될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 먼저 함께 항해에 나서는 일행이 요트를 지금보다는 훨씬 능숙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야간항해와 악천후에 대비한 트레이닝은 필수다.
항해 중 외부와 수시로 교신해야 하기 때문에 성능이 우수한 통신장비도 추가 구입해야 한다. 요트에 이미 켄우드 무전 시스템이 장착돼 있지만 위성전화도 새로 구입해야 하고 선박과 선박, 선박과 육상간 자동 송수신 장치인 선박자동식별시스템(AIS)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시간을 바다에서 보내야 하기 때문에 바닷물을 정수해 식수로 사용하는 워터 메이커도 준비할 계획이다.
남 회장과 원정대원들이 사비를 모아 꽤 많은 준비를 했지만 출발이 가까워 질수록 예산이 빠듯하기만 하다. 남 회장은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한편 기부금 모금 사이트인 ‘고펀드미’에 조만간 계좌를 열어 원정 취지에 동감하는 개인 혹은 사업체에 후원도 요청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남 회장의 애창곡은 강산에가 부른 ‘거꾸로 강을 거슬로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이다. 가사 중에서 ‘막막한 어둠으로/별빛조차 없는 길일지라도/포기할 순 없는 거야/걸어 걸어 걸어가다 보면/뜨겁게 날 위해/부서진 햇살을 보겠지’라는 대목이 제일 가슴에 다가온단다.
102명의 한인들로 첫 발을 내디딘 한인 이민사는 별빛조차 없는 막막한 어둠 속에도 뚜벅뚜벅 전진해 오늘의 눈부신 한인사회로 이어졌다. 남진우 회장은 ”지난 1990년 한인으론 최초로 단독 태평양 횡단에 성공한 강동석씨의 용감한 도전에 큰 자극을 받아 우리도 도전에 나서게 됐다“면서 ”120년 한인 이민 역사 속에 축적된 이민 후손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고국에 널리 전하고 오겠다“고 다짐했다.
<노세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