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창영 부부 주최 ‘한국 독립 후원 만찬’에 참석 발언
‘프린스턴 헤럴드’1944년 4월21일자 신문 1면 게재
프린스턴 유학생 임창영 독립운동 활동중 아인슈타인과 인맥
“세계적 석학 아인슈타인도 한국 독립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의 독립을 이끌어내기 위해 미국에서 고군분투하던 박사 과정생의 열망에 이끌려 한국 독립을 위해 함께 행동한 외국인들도 적지 않았고 그 중에는 세계적 석학 알버트 아인슈타인 박사도 있었다.
광복 77주년을 맞아 본보가 확인한 ‘프린스턴 헤럴드’ 1944년 4월21일자 신문에는 아인슈타인 박사가 ‘한국 독립 후원 만찬’에 참여해 발언한 내용이 1면 머리기사로 생생히 소개돼 있다.
이 신문 기사에는 “임창영씨 부부가 1944년 4월15일 프린스턴 낫소 터번에서 개최한 만찬에 이승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과 서재필 박사 등 뉴욕과 필라델피아, 워싱턴DC 등에서 활동하는 한인과 한국 독립을 지원하는 프린스턴 인사 등 70여 명이 참석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기사에 따르면 이날 행사에서 프린스턴대의 루터 아이젠하트 대학원장, 존 맥케이 신학대 학장 등과 함께 아인슈타인 박사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연설했다.
기사에는 “아인슈타인 박사는 국제기구와 인류의 안녕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세계의 작은 나라들을 묘사하면서 한국이 극동 지역의 힘의 균형에 한 요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며 한국의 중요성을 부각했다는 내용이 적혔다.
또 이 기사에는 프린스턴대 윌리엄 메이어스 교수를 의장으로 하는 ‘프린스턴 자유한국위원회’가 결성됐고 아이젠하트 대학원장, 월리엄 카펜터 정치학과장, 존 슬라이 정치학과 교수 등 프린스턴대의 주요 인물들이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내용이 소개됐다.
그간 임창영에 대한 연구와 서적 등에서 프린스턴에서 열린 ‘한국 독립 후원 만찬’에 대해 소개되기는 했지만 정확한 개최 시기에 대해서는 다소 이견이 있었다. 이 신문 보도는 당시 행사가 1944년 4월15일에 열렸음을 확인해주는 것은 물론, 아인슈타인 박사 등 참석자들의 면면과 발언 내용이 상세히 기록됐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이처럼 당시 세계적 석학들이 한국 독립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게 된 것에는 당시 프린스턴대에서 공부하던 유학생 임창영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09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임창영은 1930년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뉴욕신학교를 거쳐 1936년부터 6년간 뉴욕한인교회 4대 담임목사로 재직했다.
1941년 프린스턴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후부터 임창영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몸담기 시작해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의 존재와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 활동에 헌신했다. 그 과정에서 아인슈타인 박사 등 프린스턴대의 학자들과 인맥을 쌓았고 한국 독립을 지원하는 ‘프린스턴 자유한국위원회’까지 조직한 것. 이 활동은 당시 주미외교위원부를 이끌고 있던 이승만 등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
임창영은 독립 이후 한국의 근대국가 건설을 이끌 인재양성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인식 하에 1944년 10월 ‘한인교육재단’을 결성한다. 이 재단에도 프린스턴대 교수들이 대거 참여했다. 임창영은 미국에 유학 중인 한인 학생, 미주 한인 1.5~2세들을 교육해 독립 후 한국의 미래를 이끌 인재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갖고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프린스턴대 교수들을 찾아다니며 미국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결국 미 국무부가 예산 지원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현실화되지는 못했다.
이후 임창영은 제2공화국 시절인 1960년부터 1961년까지 1년간 주유엔 한국대사를 맡았다. 1961년부터 1978년까지 뉴욕주립대 뉴팔츠캠퍼스 교수로 재직하며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북한을 방문하는 등 통일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1996년 캘리포니아에서 8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당시 뉴욕타임스가 그의 부고 소식을 전하는 등 모국에 많은 영향력을 끼친 미주 한인으로 평가된다. <서한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