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인간이 자유를 얻기 위하여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이 사건에 무엇보다 커다란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자유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것임을 우리 모두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이 자유를 위해서 독립을 얻은 그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자유인이라고 부릅니다. 자유의 투사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자유를 추구함으로 자유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유인이기 때문에 자유를 추구하게 됩니다. 소위 “노예근성”이란 노예의 자리를 당연히 삶의 자리로 알고 자유인의 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바꾸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함으로 도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둑이기 때문에 도둑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 도둑의 영성이 도사리고 있으므로 그는 도둑질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를 추구하는 어떤 행위보다 자유인의 인격에 더 커다란 의미를 부여해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참으로 자유인이라면 자유는 추구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벤허>라는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 영화속에 한 감동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벤허가 노예가 되어서 노예선에서 배의 노를 젓고 있는 그 장면을 기억하시겠지요? 이때 한 사령관이 배를 젓고 있는 벤허를 바라보다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비록 종의 신세가 되어 배의 밑바닥에서 노를 젓고 있지만 그의 눈과 그리고 삶의 태도는 남과 달라보였습니다. 사령관은 벤허를 바라 보다가 이렇게 소리를 칩니다. “저놈은 노예가 아니야. 자유인이야. 저를 풀어 주어라.”
자유인의 참된 인격됨이 없이 우리가 일시적 정치적 자유를 얻는 다고 해서 그 자유가 우리에게 진정 자유로운 삶을 보장해주지는 못합니다. 바로 이 사실이 우리 한국 민족사의 비극입니다.
독립을 얻었지만, 자유를 얻었지만 참으로 자유하지 못하는 민족이라는 이 점이 우리가 처한 역사적인 삶의 현장이요 현실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참으로 자유하지 못한 것은 우리가 얻은 자유가 어떤 의미에서는 피동적으로, 수동적으로 국제 사회적의 정치적 흐름에 의해서 주어졌기에 그리고 자유인의 의식이 없이 자유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유에 대한 성숙한 이해의 부족, 이것은 결과 적으로 시민 정신의 미숙함을 낳았고 국민 윤리의 퇴보로 가져왔으며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이 자유인의 의식이 결여된 채 아직도 민족사의 배는 방향을 찾지 못한 채 표류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로마의 정치적 위험 속에 직면하여 데모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로마에 있는 그 많은 노예들처럼 자기들은 아직은 완전한 의미에서의 노예가 아니라는 사실에 관해서 유치한 자존심과 자부심을 가지고 현실에 만족하려고 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는 로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거의 삼분의 이가 노예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습들을 바라보시면서 그들에게 보다 근본적인 자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말씀을 듣자마자 유대인들은 반문합니다. “아니 선생님. 언제 우리가 종이 되었던가요?” 이때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만약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그들은 정치적 자유 이상의 보다 근원적인 자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주께서는 지적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적인 자유보다, 영혼의 자유를 찾는 이것이 진정한 자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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