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동물들이 무리를 지어 살아갑니다. 하지만 <고슴도치>는 혼자 삽니다. 고슴도치가 <고독>을 즐겨서 혼자 사는 것은 아닙니다. <외로움>을 느끼면 무리에게 다가가지만 그들은 의도하지 않는 상처를 서로에게 주기만 할 뿐입니다. 우리는 다 <고슴도치>와 같습니다. 북미산 고슴도치만 해도 3만개의 비늘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30년만 산다고 해도 3만개 정도의 상처를 갖고 살아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한번 쳐다보십시오. 세월의 상처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왜 인생이란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살다가 끝이 나는지, <상처의 치유자이신 예수님>을 생각해봅시다. 부활의 새벽에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은 바로 3일전에 십자가의 사형틀에서 처형당하셨을 때, 가지신 바로 <그 상처>를 그대로 지닌 채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목회를 하시는 중에 사람들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으시고, 또한 배반을 당한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이 부활의 새벽에 우리가 만나야 할 예수님은 자신의 상처를 안고 다른 사람의 상처를 돌보신 "상처입은 치유자"라 불리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보시면,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두려움에 질려서 문을 잠근 채 비밀리에 만나고 있을 때, 바로 그 자리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주님은 쉴 새 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로마제국의 바로 그 한가운데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세 번 : ①v.19, ②v.21, ③v.26) .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흘 전, 예수님께서 로마제국에 의해 처형을 당하셨을 때, 바로 그때 예수님의 몸에 생긴 흉터를 보게 되자, 그가 바로 사흘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이심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은 자신들을 찾아오신 분이 그들을 절망하게 만든 바로 그 예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자, 두 번째 이르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오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평강의 인사>를 반복하시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의 원인은 바로 이 <평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3일전에 바라본 예수님의 십자가의 모습은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양 손에 못이 박히면서 비명을 지르시던 예수님, 양 발에 못이 박히시면서 고통의 절규를 하시던 예수님, 허리에 창으로 찔리시며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 이마에 박힌 굵은 가시관 때문에 피를 흘리시던 바로 그 예수님의 처절한 죽음, 폭력을 행사하는 로마제국의 잔인함, 이것을 두 눈으로 목격하면서 바로 여기에서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아 <두려움의 트라우마>가 생긴 것입니다. 바로 이 트라우마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은 19절에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문이 저절로 닫힌 것(“Shut")이 아니라, 두려움의 트라우마에 빠진 제자들이 문들을 닫았다("locked")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예수님처럼 상처를 입은 채로 "치유자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 "상처 입은 치유자의 비상"이란 말씀을 통하여 이 해결책을 이야기 하려 합니다.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한번이라도 창공에 머문 적이 있다면 좀처럼 내려오고 싶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하늘을 날고 싶은 희망, 요즈음처럼 세상 그 어디에서도 희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이 때,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 같은 이 희망을 다른 말로 <비상(飛上)>이라 합니다. 비상은 "날아 위로 올라가다"라는 말입니다. "어떠한 한도나 한계를 뛰어 넘어 벗어나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지금 우리 앞에 놓여있는 불가능한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처 입은 치유자가 그 한도와 한계상황을 뛰어넘어 날아오를 수 있는 비상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23절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나는 너에게 죄를 용서할 힘을 준다"고 말씀하신 이 생명의 구주 예수님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 요20:19-23절은 우리에게 상처 입은 치유자로 비상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상처가 없는 치유자는 상처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상처가 없는 치유자는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가슴>이 열리지 않습니다. 상처의 치유자 예수 그리스도, 상처입은 치유자 예수그리스도는 우리가 예수님이 상처의 치유자이심을 믿고 그 이름 예수를 힘입어 생명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날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주님의 왕성한 치유가 여러분의 사업, 직장, 가정, 자녀와 범사에 생명의 역사로 비상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