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청 후 하루도 안 돼 3배 넘는 금액 승인해줘
발급 규모 나날이 늘어 대규모 연체 사태 가능성
건물에너지 효율 개선프로그램‘페이스’(PACE: Property Assessed Clean Energy)가 서브프라임 사태를 재현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페이스는 주택 에너지 효율을 높이기 위한 목적의 리모델링 비용을 정부 보증 대출 형태로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월스트릿 저널은 최근 보도에서 페이스 발급이 지난 몇 년 새 급증했지만 대출 심사 및 발급 과정이 허술해 자칫 대규모 연체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정부 프로그램’이란 이름으로 주택 소유주들의 신뢰를 얻고 있지만 과거 서브프라임 사태 때처럼 대출 자격을 따지지 않고 무분별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월스트릿 저널이 시한폭탄처럼 운영되고 있는 페이스 프로그램의 현황을 자세히 살펴봤다.
■ 대출 2년만에 차압 위기
잉글우드에 거주하는 디나 화이트는 2년 전 한 건축업자의 소개로 페이스 프로그램을 통해 약 4만2,000달러의 대출을 받았다. 화이트가 페이스 프로그램을 신청한 시기는 남가주 전역에 걸친 가뭄 현상으로 물을 절약할 수 있는 건식 조경으로 교체가 한창이던 시기다. 화이트 역시 페이스 프로그램을 통해 건식 조경으로 바꿔 ‘물값’을 절약해 볼 계획이었다.
대출 기준이 걱정됐지만 페이스를 소개한 건축업자의 ‘정부 프로그램이라 문제없다’는 말에 의심 없이 신청했다. 대출 발급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까지 좋았지만 그 이후부터 문제였다. 조경 공사의 진행은 툭하면 지연되고 완공은 예정일 넘기기 일쑤였다. 월스트릿 저널측이 공사 업자와 최근 연락을 시도한 뒤에야 완공됐고 대출 발급 기관에 따르면 해당 공사 업자는 수주 간 영업 정지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화이트가 최근 대출 상환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소중한 보금자리가 차압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건축업자의 말만 듣고 페이스를 신청한 것과 프로그램 내용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이 큰 화근이었다.
■ 대출자의 상환 능력과는 무관
페이스 프로그램은 일반 주택 담보 대출인듯 하면서도 정부 프로그램이란 이름을 달고 있어 일반 주택 소유주들의 이해가 쉽지 않다. 에너지 효율을 높이기 위한 공사를 실시하는 주택 소유주들에게 발급되는 대출이 페이스 프로그램이다.
주택 담보대출과 다른 점은 대출 심사 기준이 해당 주택 재산세 산정을 위한 감정가로 소유주의 대출 상환 능력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대출을 받기 위한 다운페이먼트가 필요 없는 대신 발급된 대출액은 재산세에 포함돼 1년에 1~2차례 상환하면 된다는 것도 일반 주택담보 대출과 다른 점이다. 화이트의 경우 페이스 대출을 발급 뒤 1년에 약 1,215달러였던 재산세가 약 6,500달러로 인상됐다.
대출 형태로 발급받지만 재산세로 전환되기 때문에 연체가 발생할 경우 1순위 근저당으로 효력이 발생하게 된다. 페이스 프로그램의 대출액은 약 5,000달러에서부터 많게는 약 10만달러까지로 평균 대출액은 약 2만5,000달러다. 대출 적용 이자율은 약 6%~9%이며 상환 기간은 약 5~25년이다.
■ 발급 규모 급속도로 성장
페이스는 각 지역별 정부 기관이 대출 기관과 협력해 발급하는 대출 프로그램이다. 발급된 대출액은 각 정부 기관이 재산세 형태로 징수한 뒤 대출 기관에 대출액을 대신 상환하는 대신 대출 기관으로부터 일정수수료를 지급 받아 세수로 충당한다. 페이스 프로그램을 통해 현재까지 약 34억달러의 대출액이 지급됐고 내년까지 발급액이 2배로 늘어날 것으로 업계는 전망중이다. 융자 업계에 따르면 페이스가 현재 미국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융자 상품 중 하나일 정도로 발급 규모가 빠르게 늘고 있다. 페이스 발급액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이유는 투자자들의 높은 관심 때문이다.
과거 ‘모지기 담보부 증권’(MBS) 처럼 페이스를 통해 발급된 대출 역시 채권화 돼 뮤추얼펀드, 보험회사 등 대형 기관 투자가들에게 매각되고 있다. 페이스 대출 채권은 비교적 수익률과 신용도가 높다는 장점 때문에 기관 투자가들 사이에서 관심이 매우 높은 투자 상품이다.
■ 대출과정, 홍보 절차 모두 허술
페이스 프로그램의 홍보 및 중개 과정이 허술하다는 것도 지적됐다. 대출 은행이 정식 융자 중개업체를 통해 신청과 발급이 이뤄지는 일반 주택 담보 대출과 달리 페이스 프로그램의 경우 건축업자들이 중개인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개를 담당하는 건축업자는 대출이 성사될 경우 대출 건당 약 500달러의 소개비를 받는 것이 보편적이다.
페이스 프로그램은 또 각 카운티 박람회 등의 행사장이나 텔레마케팅을 통해서도 홍보되고 있는데 중개와 홍보 담당자들이 대출 관련 지식이 부족해 소비자들에게 잘못된 정보가 전달될 수 있는 것이 문제다. 미자격자들에 의한 잘못된 정보가 주택 소유주들이 상환 의무에 대한 오해를 발생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 빠른 대출 속도만큼 부작용도 커
샌호제 거주 신디 벤추라는 지난 여름 부식으로 손상된 하수관을 수리하기 위해 수도관 수리업자의 소개로 페이스를 신청했다. 개인 파산을 신청해 담보 대출이 불가능했고 별도의 수리비도 없었기 때문에 페이스 프로그램만이 수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결국 페이스를 통해 약 1만6,732달러의 대출을 이자율 약 6.5%, 5년 상환 조건으로 대출받았다.
그러나 벤추라는 여전히 대출 조건과 프로그램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일반적인 대출과 달리 부동산 ‘사정액’(Assessment)이란 단어가 사용됐기 때문이다. 벤추라씨는 해당 대출 기관에 대출 서류와 관련, 여러 차례 문의 연락을 했지만 속 시원한 답변을 못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해당 기관은 이미 벤추라에게 적절한 답변을 전달했다는 입장이다.
우드랜드힐스의 말콤 스캇씨도 최근 페이스 프로그램을 통한 대출을 받았다. 에어컨과 난방 시설을 새것으로 교체하고 기타 리모델링도 함께 실시하기 위해 필요한 약 3만4,000달러를 대출받기 위해서였다. 당초 가지고 있던 현금으로 지불하려고 했지만 건축업자의 설명을 듣고 페이스를 신청하기로 결정한 것.
놀란 것은 신청한지 하루도 채 안돼 승인 연락이 왔고 신청 금액의 3배 가까이 되는 약 9만4,000달러가 승인된 것이다. 스캇의 주택 가치가 높아 더 많은 금액이 대출될 수 있다고 은행측이 제시했지만 공사에 필요한 약 3만4,000달러만 대출받았다고 한다. <준 최 객원기자>
건물 에너지효율 개선 프로그램‘페이스’ 대출의 부작용이 최근 잇따라 지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