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구들과의 대화 도중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최근 한 지인이 안락사를 선택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시작된 이야기였다.
회복 가능성이 없는 불치병에 걸렸고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더 이상 의학적 치료는 아무 효과가 없다. 그런데 육체적 통증이 너무 심해서 살아있는 매순간이 고통의 연속이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 질문에 친구들은 모두 “스스로 죽음을 택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사는건 사는게 아니다… 태어날 때는 내 뜻이 아니었지만 갈 때만큼은 내 의지대로 가고 싶다… 죽는 날과 시간을 직접 정하면 좋겠다… 진통제에 취해 몽롱한 상태로 작별하고 싶지 않다… 살아서 보는 마지막 풍경이 병실 천정이 아니기를 바란다… 나무 아래 누워서 자연의 숨결 속에 잠드는 것이 최후의 소원이다…”
한 친구는 캘리포니아에서 안락사가 허용되는지 몰랐다며 만일의 경우 자신은 스위스로 떠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면서 ‘기뻐’했다.
캘리포니아주는 2015년 안락사법(End of Life Option Act)을 통과시켜 다음해 6월9일 시행에 들어갔다. 당시 적지 않은 환자들이 의료진과 함께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가 시행 직후 곧바로 죽음을 선택했을 정도로 존엄사는 오랫동안 많은 이들에게 간절한 소망이었다.
이 법에 따르면 가주에서 안락사는 예상 수명이 6개월 이하인 성인 불치병환자가 의사에게 ‘생명을 끊는 약’을 구두로 2회, 서면양식으로 1회 요청하면 허용된다.(2회 구두 요청의 간격은 처음에 15일이었으나 2022년 1월 법이 개정되어 2일로 단축됐다.) 의사에게 요청할 때는 2명의 성인이 입회해야하는데 그중 한 명은 환자의 죽음으로 인해 재정적 혜택을 입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의사는 환자의 정신상태가 정상이고, 자발적 결정이며, 스스로 투약할 수 있는 상태임을 확인하면 치사약물을 처방할 수 있다.
지난 주 LA타임스는 안락사를 택하고 떠난 두 사람의 스토리를 소개했다. 하나는 피부암으로 시작해 골수암, 뇌암, 척수암으로 번져가며 10년 동안 투병하다가 마침내 안락사를 선택한 52세 남성의 사연이고, 다른 하나는 근위축경화증(루게릭병)으로 고생하던 아내가 가족친지들에 둘러싸인 채 안락사 약을 복용하고 떠나기까지의 순간을 할리웃의 한 작가가 기록한 글이다.
이 신문에 따르면 캘리포니아에서는 안락사가 합법화된 이래 5,168명이 신청했고 그중 3분의 2가 실제로 약을 복용한 후 세상을 떠났다.
미국에서 안락사법이 처음 시행된 것은 1997년 오리건주에서였다. 당시 주민들의 찬반논쟁이 어찌나 치열했던지 ‘오리건에서 죽기’(How to Die in Oregon)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만들어졌을 정도다. 이후 유사한 법이 워싱턴, 몬태나, 버몬트에 이어 가주에서 통과되었고, 지금은 콜로라도, 워싱턴DC, 메인, 하와이, 뉴멕시코, 뉴저지 등 11개주가 이를 시행하고 있다.
텍사스와 매사추세츠 주는 안락사는 아니지만 환자 자신이 인공적인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존엄사’를 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안락사는 약물투입을 통해 인위적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 존엄사는 심폐소생술이나 산소호흡기, 영양공급 등의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그보다 훨씬 일찍 1980년대부터 인간의 ‘죽을 권리’를 주장하며 미국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사람이 있다.
‘닥터 데스’라 불렸던 잭 케보키언(1928-2011) 박사, 90년대부터 공개적으로 안락사를 시행하여 9년간 말기환자 130명의 죽음을 도왔고 결국 1999년 2급 살인죄로 수감되어 8년 복역 후 가석방되었다.
알 파치노가 주연한 배리 레빈슨 감독의 ‘너는 잭을 몰라’(2010, You Don’t Know Jack)는 케보키언 박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당시엔 반윤리적 ‘살인’으로 지탄받았던 안락사가 지금은 대부분의 문명국가에서 허용되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영화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2005년 오스카 외국어영화상을 탄 ‘시 인사이드’(Sea Inside)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명작이다. 스페인에서 25세 때 다이빙하다가 다쳐서 하반신 마비가 된 라몬 삼페드로가 30년 동안 국가를 상대로 죽을 권리를 달라고 투쟁하는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펼쳐진다.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2021년 영화 ‘다 잘된 거야’(Everything Went Fine)는 갑자기 쓰러진 아버지로부터 죽음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은 딸이 갈등하는 스토리, 이 역시 문제작으로 호평 받았다.
이 외에도 안락사가 불법인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은 오스카 4개상을 휩쓴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2004)와 칸 황금종려상을 받은 프랑스 영화 ‘아무르’(2012)에서 아프게 그려진다.
윤여정이 주연한 ‘죽여주는 여자’(2016)는 노인 매춘으로 살아가던 ‘박카스 할머니’가 고독사를 기다리는 할아버지들을 진짜로 죽여주는 ‘자비의 손길’을 베푼다.
여기서 더 나아간 이야기가 작년에 나온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플랜 75’다. 초고령화 사회의 일본, 의료비와 사회보장비가 증가하고 경제성장이 둔화하자 75세 이상 노인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법이 시행된다. 공무원들은 노인들에게 죽음을 권유하고, 죽기로 결심하면 위로금을 주고 장례도 치러준다. 노인들은 마지막 온천여행을 다녀온 후 목덜미에 패치를 붙이고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너무 섬뜩한가?
거의 모든 선진국이 고령사회로 접어들었다. 이제 우리는 모두 죽음의 질에 대해 생각해야하고 ‘만일의 경우’에 관해 가족과 대화해야한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화두는 바로 ‘오늘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LA미주본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