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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의 시선] 한물 간 차이콥스키 콩쿠르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3-07-05 14:45:21

정숙희의 시선, LA미주본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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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LA미주본사 논설실장)

지난달 20~29일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차이콥스키 국제콩쿠르에서 한국인 연주자들이 바이올린, 첼로, 성악, 3개 부문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바이올리니스트 김계희, 첼리스트 이영은, 그리고 테너 손지훈이 각각 1등을 차지했다는 낭보다. 이들 외에도 한국인 5명이 상위권에 입상하는 좋은 결과를 거뒀다.

하지만 이 소식에 대한 국내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거의 전무하다. 평소 같으면 세계적인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한국인이 한명도 아니고 세 명이나 주요부문 우승을 싹쓸이했다면 언론에서 난리가 났을 것이다. 이제껏 이 대회에서는 성악 부문에서만 한국인 우승자(최현수, 박종민, 서선영)가 나왔을 뿐 기악 부문에서는 한 명도 우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용한 이유는 두말 할 것 없이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이다. 작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서방세계는 러시아에 대한 각종 제재와 단절로 블라디미르 푸틴의 만행을 규탄해왔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확실하게 손절에 나선 분야가 클래식 음악계였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뉴욕 필하모닉을 필두로 유럽의 뮌헨 필하모닉, 라 스칼라 등 유수 음악단체들은 친 푸틴계 러시안 공연자들과의 계약을 모두 취소했다. 대표적 인물이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로 평소 푸틴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친분을 과시했던 이들은 앞으로 (아마도 영원히) 미국 무대에는 서지 못하게 됐다. 

이와 함께 국제음악콩쿠르연맹(WFIMC)은 작년 4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긴급총회를 열고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회원자격을 박탈했다. 연맹은 “러시아의 야만적인 전쟁과 잔혹한 인명 피해 앞에서, 러시아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고 선전도구로 사용되는 콩쿠르를 더는 회원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표결에서 회원(120개 대회)의 90%가 찬성했다고 전했다.  

한국 정부도 이 같은 움직임에 동참했다. 올해 초 병무청은 병역특례 혜택을 주는 국제콩쿠르 명단에서 러시아가 주관하는 차이콥스키 콩쿠르, 모스크바 발레콩쿠르, 아라베스크 발레콩쿠르의 수상자를 제외한다고 밝혔다. 

분위기가 이쯤 되니 올해 제17회 차이콥스키 대회를 앞두고 젊은 연주자들의 갈등과 눈치 보기가 심했던 모양이다. 나가자니 찜찜하고, 안 나가자니 기회가 아깝고, 나가서 입상했다 한들 콩쿠르 위상이 전만 못할 것 같고….

주최 측이 이런 기류를 모를 리가 없어서 신청자들에게 대회참가비 전액 면제에 왕복교통비까지 부담해준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참가신청기간도 한차례 연기해주는 등 음악전공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꽤나 노력했다는 뒷얘기가 들린다. 

최종 참가신청자는 742명, 2019년의 954명에 비하면 20% 줄어든 편이지만 전쟁 당사국에서 열리는 콩쿠르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참가자들의 국적 다양성은 줄었고 연주 수준은 상당히 내려갔다고 평가된다. 본선 진출자 236명 가운데 러시아인이 128명으로 절반이 넘었고, 다음이 중국인, 세 번째가 한국인이었다. 서방국에서 실력 있는 유망주들은 각자 신념에 따라 혹은 자국 내의 정치적 여론 때문에 참가하지 않은 것이다. ‘한국인 대거 우승’이라는 이변이 일어난 배경이다. 

따라서 이번 대회의 우승자들이 과거 차이콥스키대회 우승자들과 견줄만한 실력과 위상을 인정받게 될 지는 지켜보아야할 문제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대회 부상으로 따라오는 연주기회다. 보통 유명 콩쿠르에서 입상하면 상금도 크지만 연주자들은 세계를 돌며 다양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거나 독주하는 기회를 얻게 되고 음반계약도 맺게 된다. 하지만 이번 입상자들에게는 이런 기회가 원천봉쇄된다. 서방세계와의 관계가 단절됐고 국제음악콩쿠르연맹에서도 쫓겨났기 때문이다. 잘해야 러시아내 도시들과 주변국들을 돌며 연주하는 게 다일 것이다.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1958년 미소 간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창설돼 오랫동안 권위있는 대회로 손꼽혀왔다. 소련이 자국 문화예술의 우월함을 세계에 선전하기 위해 열었던 제1회 대회에서 경쟁국 미국의 금발청년 밴 클라이번이 차이콥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을 기막히게 연주해 우승했던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당시 심사결과를 발표하기 전에 크렘린궁의 승인을 받아야했는데 흐루쇼프 서기장에게 심사위원단이 만장일치로 클라이번을 뽑았다고 보고하자 “그가 최고라면 그렇게 하라”며 승인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게 클라이번은 미국의 영웅이 되었고, 귀국하자마자 클래식 음악가로는 최초로 뉴욕에서 색종이테이프 퍼레이드를 가졌을 정도로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를 기념하는 밴 클라이번 피아노콩쿠르에서 작년에 우리의 임윤찬이 최연소 우승해 세계인들을 열광시켰고….

그때이후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훌륭한 수상자들을 다수 배출하며 높은 위상을 쌓아왔다.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와 다닐 트리포노프,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첼리스트 요하네스 모저, 소프라노 데보라 보이트 등 최정상에서 활동하는 연주자들이 이 대회 출신이다.

한국인 중에는 피아니스트 정명훈과 백혜선, 임동민, 임동혁, 손열음, 조성진이 있고, 바이올리니스트로는 올여름 할리웃보울에서 연주하는 클라라 주미 강과 김봄소리, 미주한인 중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 알리사 박과 제니퍼 고가 있다.

4년에 한번 전 세계에서 내노라하는 연주자들이 모여들어 피 끓는 경쟁을 벌이던 대회가 갑자기 핍절해졌다.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푸틴이 일으킨 우크라이나 전쟁의 또 다른 캐주얼티다.              

[정숙희의 시선] 한물 간 차이콥스키 콩쿠르
정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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