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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아침] 알고 보면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2-02-25 09:18:19

행복한 아침, 김정자(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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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자(시인·수필가)

                                                                                        

손주들이 어렸을 무렵 한창 질문 세례가 무성했던 시절이 있었다. 예쁜 질문, 난처한 질문이 쏟아지면서 문득 할머니는 왜 할머니가 되셨어요. 느닷없는 손녀 질문에 “그냥 할머니가 좋아서 할머니로 살기로 했단다” 궁여지책 답일 수 밖에. 

알고 보면 할머니는 처음부터 할머니가 아니었는데. 푸르고 청청했던 시절엔 생명의 산실로 탄생의 기적에도 참예했었고 양육의 인내까지 묵묵히 감내하며 가정이란 울타리를 고군분투 억척으로 지켜 내온 전설의 전사였다. 물색 없는 서방님들이 저질러 놓은 치다꺼리를 도맡으며 웬만한 풍파 쯤은 끄떡 없다며 최전방 불침번으로 때론 후방 패잔병들을 돌보는 일로 생을 바쳐 지켜온 훈장 없는 영웅들이었다. 젊음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열병같은 앓음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고운 엄마를 둔 손주를 바라보며 뿌듯함에 취해보지만 알고 보면 할머니도 젊고 고운 엄마 시절이 있었는데 어찌 실없는 규명 불명 눈물이 고인다.

알고 보면 젊음의 열정이 분출될 즈음이면 젊음들은 사랑에 빠진다. 사랑이 깊어지고 무르익다 보면 그대를 만나고 영원으로 이어질 언약이 이루어지고 지고지순 아낙의 삶이 시작된다. 일제 강정기 끝날 무렵에 태어나 유년에 해방을 맞은 세대들은 투명인간처럼 존재감 없이 묵언의 수고와 헌신의 표본처럼 살아왔다. 이즈음 젊은 세대들 행보와는 비교될 수 없는 고전적 삶의 방식을 고수해 왔다. 동 시대 여인들은 개인의 삶을 누리지 못한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 가정이라는 포대기에 자녀와 시부모를 포함해 남편까지 싸 업고 험난하고 길고 긴 터널을 묵묵히 견디어 왔다. 이를 비교할 수 없음을 익히 알고 있기에 부럽기도 하거니와 언감생심 흉내조차 엄두에 없는지라 설령 그런 자리에 앉혀준다거나 기회가 주어진다한들 손사레 치며 뒷걸음질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시대 흐름에 어울리는 통상적 아줌마 이전 시절로 조망 해본다한들, 설령 지금처럼 좋아진 세상에서 살게 해준다한들 대물림해온 안사람들의 향수어린 자화상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지라 위로받을 따스한 이야기로  남겨두고 싶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아름다웠노라는 말을 남길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남존여비 광풍 소용돌이가 떠오름을 밀어내기가 쉽지 않노라고 토로하고 싶음을 어이하랴. 어딘가 빨리 도착해야 할 것 같은 초조로움에, 웬만한 상채기 쯤은 본체만체로, 조금은 멈추라는 몸의 신호도 번번히 무시해왔던 단련된 노구가 이제사 편안하게 먼 하늘을 응시하는 여유를 얻는다.

어느 노부부의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다. 결혼 삼 십년 만에야 처음으로 부부동반 여행을 떠났더란다. 시어머니 성화에 아무래도 더는 부부라는 인연을 이어가지 못할 정황이라 마지막 여행이라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단다.  집안에서 맴돌던 아내 모습을 바깥에서 비로소 가까이서 보게 되면서 까칠하니 수척한 모습이더라는 것이다. 보름달 같았던 고운 새색시 모습은 온데간데 찾을 길 없었다고.  싸늘한 인연으로 끝맺으려는 각오로 떠난 여행길이었는데. 과연 남편인 자신은 무엇을 위해 이 날까지 살아왔으며, 아내 또한 과연 누굴 위해 살아왔을까. 어이해 그리도 곱던 귀한 딸이 내게로 보내졌는데 나는 과연 아내를 어떻게 대해왔었나. 갈등의 연민이 서서히 엷어져 가며 해넘이 노을처럼 사위어 가더란다.

알고보면 수많은 인류 가운데 남의 편이 될 줄 모르고 안해 편이 될 줄을 미처 모르고 만났던 것이다. 서로를 알아보며, 알아보아주는 것 만으로 벅찬데 사랑을 나누는 부부로 만난 것은 기적을 이룬 사람들임을 순간순간 떠올리며 잊지 말아야할 일이다. 서로 서운했던 마음을 치유해 줄 한줄기 희망만 붙들 수만 있다면 젊은이나 노년이나 꿋꿋이 연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을.

어느 날 우리집 할배랑 둘만의 만찬을 위해 한적한 교외 음식점을 찾은 적이 있었다. 늘상 외모에 주눅든 할멈을 식당의 은은한 조명 아래서 한참을 들여다 보시던 할배가 왜 그리 자신을 업신여기느냐고, 딸들이 자랑스러울 만큼 고운 미모를 지녔다면 그 모친 미모 또한 괜찮은 편일텐데 어찌해서 자기 비하를 하느냐고, 젊었을 땐 고왔노라고, 해서 우리도 한 땐 불 같은 사랑에 빠졌던 적이 있지 않았느냐고 하신다. 할머니 대열에 들어섰다는 자괴감과 자신감 부족으로 깊이 숨겨져 있었던 자존감이 깊은 심호흡을 끌어올린다.

‘내일은 오늘보다는 나아질거야’ 인생은 결코 너무 늦은 때란 없는 법이니까. ‘우리 할멈도 이젠 늙었구나’로 치부받는 마누라보다 젊었을 적 모습이 언뜻언뜻 남겨져 있는, 아이들 키워내느라 제 몸일랑 가꾸지도 않은 채 엄마와 아내 자리를 억척으로 지켜온 아줌마로 기억되며 살아지고 싶다. 알고보면 할멈도 귀여운 딸이었고 꿈꾸는 소녀였었고 고왔던 아가씨였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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