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할 때 소위 개혁신학 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무척 당황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평면적으로 읽으면 항상 ‘회개하고 믿으라”는 순서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 개혁 신학자들은 “구원의 서정”이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구원에 순서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서정에 따르면 중생하고 믿는 것이 먼저이고 회개가 나중에 따라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어째서 믿음과 중생이 먼저이고 회개가 나중일까? 성경에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는데… 하며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제가 말씀을 좀더 깊이 묵상하고 신학을 연구하면서 이 개혁 신학자들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믿음을 얻은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 확실합니다.
탕자의 비유(눅15:11-24) 참조 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게 “네가 회개하지 않으면 너를 받아들일 수 없다. 당장 잘못했다고 빌지 못할까?” 하고 소리를 쳤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자세히 읽어 보면 아버지는 아들을 미리 용서해 놓고 기다렸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멀리 있는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맞춘 것이 그 증거 입니다. 아버지께서 용서하셨음을 깨달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죄를 고백합니다. 감히 아버지 아들이라 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진정한 용서와 사랑을 받고 나서야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아버지가 아들에게 억지로 잘못을 고백하게 하였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며 또 그러한 상황에서는 진정한 용서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봅니다.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돌아오는 탕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조건 없이 아들을 받아들이는 아버지. 여기에 놀라운 구원의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사실 탕자는 집에 돌아가서 아들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아버지가 품꾼의 하나로만 써 주셔도 좋겠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 아들을 보자마자 달려 나와 입맞추고 죽었다가 다시 산 아들이라면서 새 옷에 새 신발로 단장을 시키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그것도 모자라 살찐 송아지까지 잡아 잔치를 열어 주었습니다. 이 때 그 아들이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그런 대접을 당연시 하겠습니까? 아마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그간의 잘못을 뉘우쳤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개혁 신학자들의 구원의 서정은 이런 식으로 설명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피조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자신의 목숨까지 우리를 위해 내던지셨습니다. 이것을 조건 없는 무조건적인 용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우리를 무조건 받아 주셨다면 우리가 이웃을 볼 때도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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