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을 떠나면서 헤어졌던 친구를 만났다. 강산이 세 번 변하고 만난 셈이다. 수선스럽고 덜렁대던 여고동창이 얌전한 아줌마로 변모되어 있었다. 얌전했던 청춘들도 아줌마가 되면 언제 그렇게 얌전했던가 싶을만큼 씩씩함과 용감이 자연발생적으로 자리잡기 마련인 것인데, 이 친구는 행동이며 말씨까지 조용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여늬 사모님의 자태가 자리잡고 있다. 사라져버린 남궁동자같은 단면이 그리워진다. 차분하고 조용한 말투가 신기하기까지 해서인지 어색하기 그지 없다. 여자란 남자 만나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듯 권력의 그림자가 친구를 바꾸어 놓은 것 같다. 사모님 자리를 지켜내기에 걸맞는 매무새며 몸가짐과 용모가 무르익듯 몸에 배어 있는 것 같다. 무의식 중에 내 모습을 흘깃 돌아보게 된다. 외양보다 마음가짐 자세가 소중하다는 지론을 가진편이라 위화감으로 민폐가 되지않는 선에서 평소 맵시나 스타일에는 거의 집중하지 않았기에 동년배로 보일것이란 기대는 아예 접을 수 밖에. 어쨌거나 여고시절의 추억이 아지랑이가 되어 번져간다. 흑백 사진을 보는 듯한 아슴푸레한 향수가 노심을 적셔준다. 낯선 이국 땅으로 건너오면서 문득 먼 지평선만 바라보아도 괜스리 가슴이 두근거렸던 그 날이 어렴풋하니 떠오른다.
유년의 학교 길도, 마을 풍경도, 동무네 집들도, 소풍길도, 심지어는 담임선생님 이름도 아련하지만 기억 속에 여직 남아있음을 어찌하면 좋을꼬. 사라져 버린 풍경들인데 마음엔 수채화처럼 신선한 영역처럼 사라져가는 것들이 되기싫다는 듯 고운 여운까지 어우러지며 마음을 지키고 있다. 금시작비(今是昨非)라도 해야하는 일은 아닐 듯하다. 사라져버리는 것들 앞에 이젠 담담해지는 연륜이다 싶었는데 붙들어두고 싶은 추억들이 기억의 거울 뒤에서 칩거하고 있음이 어쩐지 마음을 헤집는다. 늘그막 치부를 드러내는건 아닐까 우세스럽고 조금은 남세스럽기도 하다. 여태 유년의 그 날들을 품고 있었더란 말인가. 이럴땐 사라져버린 것들이 지금을 발목잡은 꼴이 되고만다. 사라져가는 것들의 경계가 분변하기 힘들어진다. 한산하고 조용한 강변이나 어촌풍경도 간간이 찾게되면 세월에 잠겨있듯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산업화의 거대한 물결에 유원지나 관광지로 이름을 내어주며 사라져버리는 것들에 동참하는 풍경들이 아쉬움으로 그립다. 소란스럽던 장터도 폐장이 되면 잠연한 침묵 속으로 잠겨든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 되고 달라지는 거리풍경이며, 울창하던 숲도 사라져버리는 것이 되어 상가로 바뀌어 가고 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적막 속에 자리잡은 아름다움은 하냥 그 곳에 머물러 주었으면 바램해 보지만 언제든 느닷없이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추억은 문득 가금씩 향수를 데불고 오지만 종적없이 기억력 속에서 영영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책을 손에 잡을 시간이 없으리 만치 한적함이 기다려질 때도 있지만 조용한 시간이 찾아들면 사라져버린 분주함이 멋쩍어진다. 조용하기만 한 것도, 늘 붐비고 바쁘기만 한 것도 탈이다 싶다. 세월도 꿈도 기억 저편의 향수도 언젠가는 흔적없이 한 줄기 바람 같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향한 그리움을 어찌할꺼나. 어느새 3월도 한 줄기 바람마냥 스치듯 흘러갈 것이다. 3월이 다 하기 전에 조용한 다짐을 해본다.
후회없이 사는 것에 집중하며 최선을 다하고 지나버린 후엔 마음을 쓰지 않기로 작심해본다. 아쉬움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것도 꼴불견이요, 괜스리 손해보는 느낌, 남을 것 하나 없는 감정 소모가 억울해졌다고나 할까. 살다보면 삶이 축소 되고, 오해도 얻게되고, 가치를 잃을 때도 있었고, 지나친 의미 부여로 허기 같은 공복감에 시달리기도 했었기에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에 단순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보이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자고 왼쪽 새끼 손가락과 오른쪽 새끼 손가락을 결연하듯 걸어본다. 세월도 꿈도 한 줄기 바람 같은 것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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