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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아침]  겨울 안개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5-12-12 08:4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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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정자(시인 수필가)      

 

이른 새벽. 안개에 둘러싸인 도심은 마치 산수화 여백처럼 단정한 침묵으로 말끔하고 단아하게 단장 되어있었다. 시야에 들어온 만상은 화선지에 색감을 입히지 않은 먹의 농담만으로 그린 수묵화를 방불케 했다. 지난 밤 안개는 그들 만의 비밀스런 행보를 저지르느라 깊은  고요와 적막 속으로 이끌어내고는 천지 분간을 하기 어려울 만큼 뿌옇게 도심을 침식하듯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다. 이른 산책길을 나서다 보면 겨울 안개가 자욱할 때가 더러 있긴 했지만 이토록 지척을 분간할 수 없으리 만치 농도 짙은 안개는 최근 들어 처음이다. 마을 윤곽도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농무로 뒤덮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안개가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듯하다. 진안개의 운치가 서정적으로 도심을 현혹하고 도심은 혼미하게 사로 잡힘을 당하고 있는 모양세다. 도심 고층 빌딩에서 만난 겨울 안개는 가히 정신 줄 놓을 만치 온통 안개만 존재할 뿐이다. 도시는 침묵에 잠겨 있고, 거리도 외등도 나무도 짙게 드리운 겨울 안개로 하여 실루엣이 되어 가물 가물이다. 자욱함 보다 강렬한 짙음으로 지척 분간이 힘든 농후한 안개에 뒤덮인 도시는 범람 당하듯 휩싸여 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산책길로 접어들었다. 뿌연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존재 근원마저 의심케 만들 참인지. 이른 새벽부터 보고 듣고 만난 것들은 무엇이며 이 모두가 허상이었나 싶을 정도다. 뽀얗기만 한 것이 보이는 것의 전부는 아닐 터이지만,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마냥 등줄기가 오싹하니 서늘해 진다. 시야를 막아서는 안개들을 밀어내기라도 하듯 손을 휘 저어 보기도 하지만 눅진한 농무는 흔들림 없이 시야를 막고 있다. 낯설고 아득한 적요가 몰고온 호젓한 정적이 숨이 막힐 것처럼 생경하다. 익숙하지 않은 어색한 뉘앙스가 서먹하고 묘하게 밀려든다. 아무 소리도 없는 텅 빈 허전함만 가득하다. 안개가 데불고 온 적적함이 고립감까지 부추기며 외로움이 가중된다. 눈은 세상을 읽어 들이는 통로인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볼 수 없는 진공상태에 놓인 듯 호흡하고 있다는 덧없음이 어찌 이리도 파장이 절박할까. 짙은 안개를 더는 묘사할 수 없을 만큼이다. 안개 속에서 안개 속으로 허우적대며 걸어 본다. 걸어도 뒤뚱뒤뚱, 걸어도 미궁일지도 모르는 안개 속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겨울 안개는 차가움을 동반한 고독이었다. 만상이 정지 된 희뿌연 공간 속에 갇힌 채 회고와 보살핌이 요구되는 인생을 돌이켜 살펴달라는 자성이 소리 지른다. 삶이란 본질을 통찰하며 새벽에 찾아 든 안개 내력에 초점을 맞추고 스스로를 각성하며 뉘우침으로 풀어내야 함을 토설 하라 한다. 생의 기로를 가로막은 안개로 하여 삶의 향방을 잃었을 때, 시야가 흐려진 순간들을 기억해내며 남은 생의 여정을 위해 용단 있는 울림의 고백시간으로 초대받은 것일까.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안개 속에서, 안개 알갱이만 존재하는 외부와 단절된 공간 속에서, 사색의 프리즘을 통해 삶이 건너온 통로를 들여다 보게 해주었다. 감각조차 비정상으로 느낄 수 밖에 없는 지경이라 삶의 실상을 잠시 멈추고 생의 덧 없음을, 홀로 스스로와 독대하듯 대화의 길을 열어 나갈 수 밖에 없음을 절절하게 깨닫게 해주었다. 길도 보이지 않고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로지 머무름에만 귀의할 수 밖에 없는 명제만 또렷한 터인데, 머무름의 계기이자 유발요인의 진원인 안개 불시 방문을 기폭제로 삼을 수 밖에. 현실을 직시하라는 결정적 원인의 실마리가 되어준 겨울 안개가 가능성의 계단을 제공해 주었다. 겨울 안개로 하여 외부와 차단된 단절로 하여 멈춤과 기다림의 미학까지 답습하게 해주었다. 혼란스러움을 가라앉히다 보면, 번잡한 한세상도 잠재워지고 만상을 희뿌옇게 덮어버리는 오만까지도 정화되듯 감각적 묘사에까지 접근하도록 예시해 주었다. 생에서 만나지는 난관, 고난의 터널,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과 비견하라는 암시까지 손에 쥐어 주었다. 

순간 같은 일각의 시간이 흘렀을까. 떠도는 바람처럼, 잊혀져 가는 기억처럼 소리 없이 순식간에 떠나버렸다. 겨울 안개가. 안개 속내를 파헤치는 거대한 소재를 제공해주고는 단순한 풍경 묘사를 넘어, 고독, 기다림. 성숙, 심오한 감정을 시각적으로 감각적으로 풀어내는 서정적 글쓰기 길목도 열어주었다. 마치 먼 길 떠날 준비를 섬세하게 재정비 시켜 주듯. 짙은 안개 속 같은 세상살이에서 먼 길을 두루 돌아오는 인생 여정의 고단함을 안개에 빗대어 보라는 예제를 예증으로 일러주었다. 불손한 의도 같은 건 전혀 읽혀지진 않았지만, 기척 없이 찾아 들었 듯이 기척 없이 아련하게 스러져 갈 것을 두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에 사로잡혔던가 보다. 어쩌면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미망의 날로 두고두고 남을 거대한 동영상을 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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