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들의 ‘홍콩 엑소더스(대탈출)’가 현실화하고 있다. 홍콩의 중국화 속도가 빨라지고 이에 따라 정치적 불안도 커지면서다. 홍콩의 ‘아시아 비즈니스 허브’ 위상에도 그림자가 드리우는 모습이다.
6일 월스트릿저널(WSJ)에 따르면 최근 다국적 기업들이 속속 홍콩을 떠나 경쟁 도시인 싱가포르와 중국 상하이에 새 둥지를 틀고 있다. 팀버랜드와 노스페이스 등 유명 브랜드를 보유한 미국 의류업체 VF 코퍼레이션은 올해 1월 25년간 홍콩에 뒀던 아시아지역본부를 상하이로 옮겼다. 일본의 소니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SIE)와 프랑스 명품 그룹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 프랑스 화장품 기업 로레알 등도 홍콩 사무실 직원들을 대거 싱가포르와 상하이로 이전 배치했다.
정보기술(IT) 기업들은 사업 확장 계획을 접고 있다. 국내 기업 네이버는 홍콩에서 운영하던 사용자 데이터 백업 서버를 싱가포르로 옮겼고, 구글의 모회사 알파벳과 페이스북은 홍콩과 미국 간 해저 케이블 연결 계획을 취소했다.
서구 자본들의 홍콩 외면은 무엇보다 미래 불확실성 때문이다. 그간 홍콩은 중국 본토와 가까우면서도 규제가 적고 달러 거래도 편한 데다 법인세율도 낮아 세계적인 회사들이 선호하는 도시로 꼽혔다. 2019년 말 기준으로 홍콩에 지역 거점을 둔 글로벌 기업은 1,541개에 달했다. 그러나 지난해 6월 중국이 홍콩 내 반중 행위를 처벌하는 국가보안법(홍콩보안법)을 제정하는 등 자치권을 흔들며 분위기가 반전됐다. 프레드릭 골랍 홍콩 주재 유럽상공회의소 회장은 WSJ에 “기업들이 처음으로 홍콩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분위기는 최근 홍콩 주재 미국상공회의소(AMCHAM)의 조사에서도 확인된다. 회원 325명 대상 설문에서 응답자의 42%가 홍콩보안법 시행에 따른 불확실성과 비관적 미래를 회사 이전 고려의 이유로 거론했다.
자유 없는 홍콩은 매력도 없다. 일본 최대 온라인중개업을 운영하는 SBI 홀딩스의 기타오 요시타카 회장은 3월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홍콩보안법을 언급하며 “사업 환경이 중국 본토와 별 차이가 없다면 임대료가 비싼 홍콩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시아 국제도시’ 위상의 상실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WSJ는 “수십 개 기업이 홍콩 지역본부와 사무실을 이전하면서 홍콩 상업용 부동산 공실률이 15년 만에 가장 높아졌다”며 “이제는 상하이가 더 매력적인 도시”라고 평가했다. “기업들에 최선의 도움을 제공하겠다”는 에드워드 야우 홍콩 상무장관의 회유도 별 소용이 없으리라는 게 기업들 반응이다.
전조가 보였던 게 사실이다. 홍콩인들의 탈출 행렬이다. 지난해에만 4만6,500명의 시민과 외국인들이 홍콩보안법을 피해 도시를 떠났다. 1월 말에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전 자국 해외시민 여권을 소지한 홍콩 시민의 이민 문턱을 영국이 확 낮추면서 2, 3월 두 달 사이 3만4,000건이 넘는 신청이 몰렸다.
글로벌 기업들이 떠난 자리는 중국 본토 기업들 차지다. 2019년 6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1년간 63개의 중국 기업들이 홍콩에 새로운 지역 본사와 사무실을 열었다. 전년 동기 대비 12% 늘어난 규모다. 같은 기간 홍콩 내 본사와 사무실을 폐쇄한 미국 회사 45곳과 대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