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이른 아침 숲길은 청청한 푸름으로 가득하다. 한더위 극성으로 하루 해가 엿가락처럼 길었는데, 푸르게 개인 하늘이 시야에 들어오고 산뜻한 풀내음에 마음이 자분자분 젖어 든다. 더운 기운이 잦아든 바람결로 하여 촉촉하게 호흡할 수가 있어 깊게 들여 마신 공기로 온 몸이 가뿐하니 정화된 듯 하다. 잔디도 눈에 띄게 선명한 초록빛이다. 한더위로 고개를 수그렸던 들꽃들이 머리를 들고 바람에 살랑거리며 서로에게 얼굴을 비벼 댄다. 여름날 아침 풍경 속으로 들어와 살아 있어 존재하는 것이 아닌 풍경화 속의 정물이 되어 본다. 자연에서 외따로 존재하는 공간에 머문 것 마냥 자연과 어우러져 주변을 둘러본다. 제자리를 지키며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정체된 시간 속에서 미세한 움직임으로 시선을 주고 받고 있다. 하늘도 구름도, 숲길도 나무도 풀들까지 적막한 정적 속, 미세한 움직임이 리드미컬하게 실려온다. 여름의 그 위대함을 말해보려 했는데 입추도 말복 절기도 지나버렸다. 8월의 허리춤이 지쳐 보인다.
자연의 순리가 차례를 기다려주지 않는 것도 아닌데 제 발걸음 빠르기로 저들 만의 분주 함으로 미세하게 서둘고 있다. 열매를 맺어야 하는 나무들은 아직 제 색을 입히지 못해 조급함이 드러나 보인다. 겉 모양새가 드러나기 시작한 열매들이 가지 끝에서 실한 햇살을 받으며 여물어가고 있다. 스스로의 숨결로 주어진 색깔을 입혀가며 주어진 일에 묵묵히 변함없이 흐름을 따르고 있다. 이렇듯 순리에 익숙한 자연인데, 이 자연스러움을 기다리지 못하는 인간들의 못 막을 도전이 종국엔 흠집을 내고 상처로 눌림 흔적을 남기는 안타까움이 멈추질 못하고 있다. 인간이 사랑해야만 하는 자연은 제모습을 잃지 않으며 계절은 순환을 여전히 변함없이 안겨주고, 보여주고 있다. 자연 속에 머물다 보면 자연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질서 속에서 유지되고 있음을 절절이 통감하게 된다. 자연의 변화는 시각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며 꾸밈없는, 억지스럽지 않은, 원래 모습에서 크게 제한이나 속박 따위로 거스르지 않기에 자연스러움을 반기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나보다.
여름은 위대했고 위대한 흔적을 낙관처럼 남기고 떠날 것이다. 여름은 다른 계절과 달리 생명이 넘실대는 계절이다. 목이 타는 뙤약볕도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용솟음이요 생명들이 풍성한 생명력을 누리는 시기가 바로 여름일 수 밖에 없음이다. 창창하게 푸른 하늘도 비에 젖은 잎새들도 생명을 노래하고 즐긴다. 한 더위 폭염도 삼복더위도 열대야도, 홍수에 장마까지도. 한 여름으로 들어서면 뜨거운 햇살과 더불어 모든 작물들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익어간다. 들녘의 벼 이삭이 피어나기 시작하고, 밭에서 자라는 무와 배추도 여물어 가고 마늘은 수확을 기다리고 고추는 빨갛게 물들어가기 시작한다. 풍성한 실과로 식탁이 다채로워지고 결실의 수확을 위해 성숙을 늦추지 않는다. 여름의 풍성함과 싱그러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긍정적인 태도는 자연 현상에서, 생활 감각이며 세시풍속에서도 보편적 민생의 정서까지도 “보기에 좋았더라” 하신 조물주의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자연은 스스로 보기 좋은 균형을 유지하며 철 따라 모습을 가꾸어 간다.
여름이면 빠뜨릴 수 없는 방학이 있는 게절이라 낭만과 행복하고 싱그러운 추억이 깃드는 계절이다. 여름이 감겨오는 감각은 언제나 상쾌하진 않지만 안보면 보고싶고, 만나면 반갑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지긋지긋해지는 면도 있다. 보편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들로 뜨거운 태양, 출렁이는 바다, 푸름에 취해 있는 나무, 풀, 들판이다. 여름이라는 자각보다 이미 여름에 압도돼 버린 답답함이 밀려들곤 한다. 하지만 움츠러드는 겨울 보다는 여름이 좋은 편이라 여름 밤에만 만나지는 시원한 바람결을 즐기기도 하고, 창 밖에 펼쳐지는 여름 풍경들을 오래오래 바라볼 수 있기를 기대해보기도 한다. 볕 살은 뜨겁지만 강렬한 몰입을 존중하고 싶다. 그 햇살로 하여 곡식은 알곡으로 익어가고 열매는 성숙한 결실을 맺게 된다. 나무는 나이테를 새기고 바람과 시간은 열매의 결실을 단단하게 키워 낼 것이다. 한 낮 땡볕만 아니면 여름날 생기 발랄한 직감을 두고두고 함께하고 싶다. 몰입의 집중력 유발이 생성해낸 에너지로 절체절명 좌우명이 되어 극진한 어미로 버틸 수 있었기에 여름 뙤약볕의 몰두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 이유라 할 수 있겠다.
여름을 지나오면서 이미 내 인생의 여름이었던 생애의 전성기를 지나와 버렸음을, 점점 낮아지는 자의식을 직감하는 하루들이 막연한 포만의 시간으로 기다려질 것 같은 아쉬움으로 몸이 뻐근해 진다. 이미 오늘 하루는 영원 속으로 사라져갔고 오늘 보다 나약할 수 밖에 없는 내일로 들어섰다. 이미 그 결국의 정답을 알고 있다는 자각이 생의 유한성을 해독해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제 몇 번의 여름이 남겨져 있을까. 한 뼘쯤 남겨져 있을 여름도 미지수의 미래로 설렘을 안겨줄 것이라 믿어 주기로 하지만 마음 깊이 잔재해 있는 그리움의 산물처럼 여분의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대 자연 속의 생명들이 가장 왕성한 생명력을 누리는 시기가 바로 지금 이 여름인 것인데, 이 남은 여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자연과 더불어 균형을 지켜가야 할 존재로 자리매김 해야 할 터인데. 여름날 일기는 언제쯤 마무리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