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퍼슨의 업적의 하나는 미국의 국토를 배로 늘린 일이었다. 7년전쟁(Seven Year's War: 1756~1763)이 끝나고 프랑스는 미시시피강 이서의 영토를 스페인에 할양했는데, 이 강의 하구 가까이 있는 뉴올리언즈항은 오하이오강과 미시시피강 유역에서 생산되는 미국의 산물을 수송하는 데에 절대로 필요한 항구였다.
제퍼슨이 대통령에 취임한지 얼마 후 나폴레옹은 약한 스페인 정부에게 루이지애나라고 불리는 넓은 지역을 다시 프랑스에 할양하도록 강요했다. 이러한 행동은 미국민들을 불안과 분노에 차게 만들었다. 미국의 바로 서쪽에 거대한 식민제국을 건설하려는 나폴레옹의 계획은 모든 내륙정착지의 교역권과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제퍼슨은 만약 프랑스가 루이지애나를 차지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영국의 함대및 국민과 결합해야 한다"고, 그리고 유럽의 전쟁에서 일어나는 최초의 포성은 영미 연합군이 뉴올리언즈를 향해 진격하는 신호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폴레옹은 영국과의 또 다른 전쟁이 임박하고 있음을 알고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도함으로써 영국의 손이 이 영토에 미치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는 제퍼슨을 헌법상 궁지로 몰아넣었다. 헌법은 정부의 어는 부서에게도 영토를 구입하는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제퍼슨은 헌법을 개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고문들은 구입을 지연시키면 나폴레옹의 마음을 바꾸게 될지도 모르고--영토를 구입하는 권한은 본래부터 조약을 체결하는 권한에 고유한 것이라고 그에게 조언하였다. 제퍼슨은 "우리나라의 양식은 엉성한 구조가 아니라 나쁜 영향을 미칠 때 그 해악을 시정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헌법 개정의 의사를 굽혔다. 미국은 1803년 1,500만 달러로 루이지애나를 구입했다. 이에는 260만 평방킬로미터가 넘는 광활한 토지와 함께 뉴올리언즈항이 포함되었다.
이리하여 80년 후에는 이 나라의 심장 지대가 되고 또 세계의 대곡창 지대의 하나가 될 광활한 평야, 산맥, 그리고 하천을 얻게 되었다. 1805년 제퍼슨이 2차 임기를 시작했을 때, 그는 영불전쟁에서 미국의 중립을 선언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다같이 상대방에 대한 중립국의 해운을 제한하려고 애썼지만, 영국 측의 해상 통제는 나폴레옹 통치 하의 프랑스 측의 그 어떤 조치보다 심각성이 훨씬 더한 교역 금지와 화물 압수의 고통을 미국 측에 안겨주었다. 1807년까지는 영국은 해군을 근 15만 병력의 수병과 해병이 승선하는 700여 척의 군함으로 증강했다. 이 막대한 해군력이 프랑스의 항구들을 봉쇄하고, 영국의 무역을 보호하며, 영국의 식민지들과의 연계를 유지하는 등 해로를 장악했다.
하지만 영국함대의 승무원들은 아주 가혹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자유로운 모병으로는 필요한 승무원을 확보할 수가 없었다. 많은 영국 해군 수병들이 탈주하여 미국 선박에 피신했다. 이러한 경우 영국군 장교들은 미국 선박을 수색하여 영국국민을 데려가는 것을 자기들의 권리로 간주했다. 이는 미국인들에게 큰 모욕감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군 장교들이 미국인 선원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영국 해군에 편입시키는 일이 흔히 있었다. 제퍼슨이 영국군함들에게 미국의 영해에서 떠나도록 명령하는 포고를 발표하자 영국측은 더 많은 미국 선원을 강제로 끌고 가 영국해군에 편입시키는 대응을 보였다. 제퍼슨은 영국해군으로 하여금 물러서지 않을 수 없게 만들게 위해 경제적 압력을 가하는 방법에 의존하기로 결정했다. 1807년 12월 미국의회는 금수령을 통과시켜, 모든 대외교역을 금지했다. 얄궂게도 제한된 정부를 옹호하는 공화주의자들이 중앙정부의 권한을 크게 증대시킨 법률을 제정했던 것이다. 단 1년 동안에 미국의 수출고는 전년도의 5분의 1로 줄었다.
이 조치로 해운업은 거의 몰락했고, 뉴잉글랜드와 뉴욕 주에서는 불만의 소리가 높아갔다.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타격이 컸다. 남부와 서부의 농민들이 그들의 잉여 양곡과 육류 및 연초를 수출할 수 없게 되자 가격이 폭락했기 때문이다. 이 금수조치로 영국이 굶주리게 되면 그들이 정책을 바꾸리라는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국내에서 불만이 커지자 제퍼슨은 금수조치를 완화하여 국내 해운업자들을 달랬다. 1809년, 그는 영국 및 프랑스 그리고 그들의 속국을 제외하는 다름 모든 국가와의 통상을 허용하는 '비교역령'에 서명했다.
1809년 제임스 매디슨이 제퍼슨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영국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두 나라는 급히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매디슨 대통령은 영국이 미국 시민을 강제 모병해간 수천 건에 달하는 사례를 보여주는 상세한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이 외에도 서북부의 정착민들은 인디언의 습격으로 피해를 입었는데, 그들은 캐나다에 있는 영국의 압잡이들이 인디언을 충동했다고 믿었다. 이는 많은 미국민들로 하여금 캐나다 정복을 찬성하게 만들었다. 캐나다 정복이 성공하면 인디언들 사이에 미치는 영국의 영향력이 제거되고, (미국의) 식민지 건설을 위한 새로운 땅이 마련되리라는 기대에서였다. 캐나다 정복의 의욕은 선원의 강제 모병에 대한 분노와 겹쳐 미국민의 전쟁 수행 열기를 북돋았는데, 이리하여 마침내 1812년 미국은 영국에 대해 전쟁을 포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