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의 많은 기업들이 인공지능(AI)과 별 관련이 없는 제품과 서비스를 내놓으면서 “AI를 적극 활용한다”고 과장하는 ‘AI 워싱(AI washing)’을 하고 있다. 말로만 AI를 외치며 마케팅 효과를 노리는 ‘무늬만 AI’인 것이다. 겉으로만 친환경을 내세운 ‘그린 워싱’처럼 시장을 혼탁하게 한다는 점에서 주의가 요구된다.
영국 MMC벤처 측은 “AI 기반이라는 유럽 스타트업 2830곳 중 약 44%가 AI 활용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AI 효율성을 부풀리거나 불완전한 AI를 완벽하다고 속이고 단순한 챗봇도 AI 시스템이라고 우긴다는 것이다. 채용 연결 사이트인 준코의 경우 AI로 적합한 지원자를 추천한다며 투자를 유치했다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와 법무부로부터 허위 정보 유포 혐의로 기소를 당했다.
글로벌 기업들도 예외가 아니다. 아마존의 경우 무인 매장 ‘아마존 고’에서 물건을 사면 나갈 때 자동 결제된다고 했으나 실상은 대규모로 인도 직원을 동원해 원격으로 매장 카메라를 보며 결제를 돕도록 한 것으로 드러났다.
P&G는 오랄비 전동 칫솔을 광고하며 AI가 치아 위치와 밝기 등을 파악해 잘 닦였는지 확인한다고 했으나 AI 기능이 어떻게 적용됐는지 해명하지 못했다. 코카콜라도 서기 3000년대를 염두에 둔 ‘Y3000’ 콜라의 한정판을 개발하며 AI를 활용했다고 했으나 그 원리를 밝히지 못했다.
이달 10일 독일 베를린에서 폐막한 국제가전박람회(IFA)에서도 가전·컴퓨터 등의 AI 워싱이 이슈가 됐다. 애플도 9일 AI 기능을 탑재한 아이폰16 시리즈를 공개했으나 그리 호평을 받지 못했다. 아직은 AI가 제품과 서비스에 내재돼 작동한다고 보기 힘든 것이다. AI 워싱은 소비자 신뢰 손상, 시장 왜곡, 기술 발전 저해 등을 초래한다. 우선 민간 차원에서 지침을 마련하고 검증 시스템을 구축해 자율 규제에 나서야 한다. 여의치 않으면 정부가 법적 규제를 통해 기업의 AI 활용 정보를 공개하도록 강제할 수밖에 없다. 소비자에 대한 AI 교육도 필요하다. AI 워싱을 걸러내고 옥석을 가려야 진정으로 AI 혁신 생태계를 활성화할 수 있다.
<고광본 서울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