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수십년 이어온 한인은행권 직위 혼란
“행장님과 부행장님은 들어오시고 전무님은 밖에서 기다리세요” 한국을 방문했던 한 한인 상장은행 관계자는 예방을 했던 곳에서 비서가 이렇게 말하자 당황을 감추지 못했던 일화를 전했다. 이 비서는 당연히 부행장이 전무보다 직급이 높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인데 사실 미주 한인은행권에서는 전무(EVP) 직급이 행장 다음의 직급으로 부행장(SVP) 직급보다 한 단계 높다. 반면 한국에서는 부행장이 행장 다음의 직급이다. 또한 직급 간소화 추세로 한국 내 은행들에서 전무와 상무 등의 직급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당시 배석했던 부행장이 사정을 애기하면서 해프닝으로 끝났다고 했지만 지금도 한인은행에서 근무하는 전무들과 부행장들은 이같은 황당한 일을 자주 겪는다고 전한다. 실제 한 한인은행의 부행장은 “은행의 2인자까지 올랐다고 고객이나 지인들로부터 축하인사를 받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일일이 설명하기도 그렇고 난감하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미 주류 은행권에서도 전무라는 직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행장(CEO 또는 President) 다음으로 부행장 직급인 부사장(EVP)이나 시니어 부사장(SEVP)이 있다. 모든 기업과 조직에서 ‘부회장’ ‘부사장’ ‘부총재’ ‘부이사장’ ‘부의장’ 등은 두 번째로 높은 직급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같이 직급 ‘부’는 전통적으로 2인자를 호칭하는데 미주 한인은행권만 2인자가 전무인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한인은행 관계자들에 따르면 미주 한인은행권에서 전무 직급이 사용되기는 가주외환은행 시절로 되돌아간다. 이후 미국에서 설립된 한인은행들이 이를 본따 행장→전무→부행장→부장 등으로 이어지는 직급 체계를 사용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미주 한인은행권의 이같은 직급 체계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상명하복과 위계질서 정서에 기인한다는 지적이다. 한 한인은행 관계자는 “한인들은 후배가 같은 직급에 있는 것을 불편해한다”며 “그래서 직급을 세분화하게 되고 예를 들어 부장급도 First Vice-President와 Vice-President로 나누게 된다”고 귀띔했다.
뱅크오브호프와 한미은행의 경우 전무들이 여러 명 있다 보니 ‘일반’ 전무(EVP)와 차별화하기 위해 ‘수석전무’(SEVP) 직급을 두고 있다.
비단 한인은행들 뿐만 아니라 미국에 있는 한국 기업들은 영어 직급과 한국식 직급을 병행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공식적인 영어 직급 외에 ‘비공식’ 한국식 직급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비한인 직원들로부터 항의를 받는 등 오해의 소재가 발생하기도 한다.
사원, 주임, 대리, 계장, 과장, 차장, 부장, 국장 직급도 모자라 여기에 ‘부장 대우’나 ‘부장 대리’ 등의 직급까지 존재하는 것이 한국 기업들의 현실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조직문화가 강한 직업군으로 분류되는 한국 내 은행들을 비롯, 한국 기업들에서는 수평적인 조직문화 확산을 위한 직급 체계 간소화 노력이 한창이다.
하나은행은 임원 직급 체계에서 ‘전무’를 없애고, ‘행장-부행장-상무’로 직급체계를 간소화하면서 기존 전무는 부행장으로 호칭이 변경됐다. 신한은행은 지난 2021년부터 부서별 구성원에 대한 호칭을 직책이 아닌 수석, 매니저, 프로 등으로 바꿔 부르는 ‘자율 호칭제도’를 시행했다. 삼성그룹은 전무와 부사장 직급을 부사장으로 일원화했다.
최근 한국에서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직장인 10명 중 6명(57.8%)은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위해 직급 간소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직급이 간소화되는 추세인데 오히려 미주 한인은행권에서는 오래전 한국 금융권이 사용했던 직급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주류사회와 한국의 변하고 있는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한 한인은행 관계자는 “혼란을 막기 위해 행장협의회 등을 통해 직급 개정을 하는 것이 이상적일 것”이라며 “자산규모 1,2위 은행인 뱅크오브호프와 한미은행이라도 먼저 직급 개정에 나서면 다른 한인은행들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환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