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10%·유럽 15% 상승, 식품기업 수익률 확대
고용 시장과 에너지 가격 변동 뒤에 가려졌던 식품 가격이 미국과 유럽 인플레이션의 복병이 될 수 있다고 월스트릿저널(WSJ)이 9일 보도했다. 식품 원자재 가격 하락과 상관없이 오르는 최종 식품 가격이 결국 전체 인플레이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이다.
WSJ에 따르면 올 2월 기준 미국 식품 가격은 전년 대비 10.2% 인상돼 에너지 가격 상승률(5.2%)을 두 배가량 상회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20개국) 역시 올 3월 식품·주류·담배 가격이 전년 대비 15.4% 올랐다. 같은 기간 유로존 에너지 가격이 0.9% 하락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당초 경제학자들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공급망 혼란으로 치솟았던 식품 가격이 곧 안정세를 되찾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실제 곡물과 기름, 설탕, 육류, 유제품 등을 포함하는 유엔의 식량 가격 지수는 2022년 3월 최고치를 기록했다가 2월 기준 약 18.7%까지 떨어진 상태다.
식량 가격 오름세는 대부분의 식품 업체들이 수익을 늘리기 위해 최종 가격을 인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계 상품 시장에서 곡식이나 식물성 기름, 설탕, 육류 등 식량 상품 가격은 지난해 이후 하락하는 추세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여러 식량 상품을 통합해 산출하는 식품가격지수는 지난해 3월 159.7로 정점을 찍은 뒤 지속적으로 하락해 지난달 126.9를 기록했다.
판테온매크로이코노믹스의 클라우스 비스테센 이코노미스트는 “식량 상품 가격이 하락하면서 식품 물가가 오르는 현상을 설명할 유일한 방법은 식품 기업의 마진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식품은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 구성 품목 가운데 13.5%를 차지해 주거(34.4%)에 이어 전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두 번째로 크다. 에너지(7.1%)보다도 비중이 크다. 인건비 상승 둔화 등 긍정적인 물가 신호에도 불구하고 식품 물가가 지속적으로 오를 경우 인플레이션 둔화 폭이 제한될 수 있는 이유다.
영국 중앙은행의 휴 필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날씨, 전쟁, 기업 이윤 등의 이유를 떠나 식품 가격이 오르면 중앙은행이 더 높은 금리로 대응해야 할 수도 있다”며 “일시적 원인이라도 물가 목표를 벗어나는 상태가 계속된다면 소비자들의 행동도 가격을 점점 밀어올리는 식으로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경고했다.
중앙은행들이 통화정책에 있어 가장 주목하는 것은 식품과 에너지 가격을 제외하는 근원 인플레이션이다. 하지만 식품은 가정에서 매일 구입하고 소비하는 품목인만큼, 식품 가격은 인플레이션 전망과 무관하게 보기는 어렵다. 특히나 식품 가격 상승으로 가계 부담이 높아지면 노동자들이 더 높은 임금 인상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고, 이 경우 임금 인상이 또 다른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앙은행들은 높은 식품 가격이 인플레이션에 미칠 영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파비오 파네타 유럽중앙은행(ECB) 집행 이사는 지난 3월 한 연설에서 기업의 이윤 확대 노력이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는 ‘이익·가격 소용돌이’ 가능성을 살펴보고 있다고 밝혔다. 당시 그는 “기업들의 기회주의적 행동이 인플레이션 하락을 지연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일부 정부들은 이미 식품 가격 안정화를 위한 조치에 나섰다. 프랑스 정부의 경우 지난달 주요 소매업체들과 6월까지 식품 가격을 낮게 유지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브루노 르메르 프랑스 재무장관은 “오늘날 프랑스의 가정을 힘들게 만드는 것은 식품 가격 상승”이라면서 “향후 3개월 간 식품 공급업체들의 마진은 수억 유로 감소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