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닫는 소비자들
고물가·고금리·은행파산,
2월 소비지출 0.4% 감소
자동차·주택·K푸드까지
여름소비·금리안정에 기대
이모씨는 “외식 줄이고 냉장고를 파먹고 있다”고 했다. 한번 오른 물가는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고 들어오는 수입은 일정한데 최근 은행까지 파산하다 보니 경기가 정말 어렵다는 생각에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씨는 “마켓에서 할인 제품 위주로 구입해 식품 구입비를 줄이고 있다”며 “냉동 식품이나 간편 조리 식품을 데워 먹거나 어머님이 보내주시는 국이나 반찬으로 끼니를 해결한다”고 말했다.
한인 치과의사도 한인들의 소비가 크게 감소하고 있음을 체감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여파에도 불구하고 2021년과 2022년에는 치과 교정 시술을 하려는 한인 환자들이 제법 있었지만 최근 들어 치아 교정을 연기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한인 치과의사는 “환자들이 금전적으로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며 “교정을 잠시 미루고 다음에 하겠다고 말하는 환자들이 부쩍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21일 월스트릿저널(WSJ)에 따르면 인플레이션과 고금리가 장기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실리콘밸리은행(SVB)과 시그니처 은행들의 파산 여파로 금융 시스템마저 흔들리자 한인을 비롯한 미국 소비자들의 소비 수요가 얼어 붙고 있다.
WSJ은 미국 소비자들의 소비가 전체 국내총생산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미국 경제에 중요한 요소인 만큼 소비 위축이 장기화되면 미국 경제의 회복과 성장에 타격이 될 수 있다는 경고를 내놓고 있다.
미국 내 소비 위축 현상은 소비자의 씀씀이에서 나타나고 있다. 지난 1월만 하더라도 미국 소비자들의 씀씀이는 상승 국면을 보였지만 2월에 접어들면서 소비 열기가 식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연방 상무부에 따르면 지난 2월 상점이나 식당, 온라인 등 미국 소비자들의 2월 소비 지출은 0.4%(계절조정치) 감소했다. 이는 1월 3.2%의 상승세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미국 소비자들의 소비 심리가 꽁꽁 얼어 붙고 있는 현상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지난 2월 미국 내 주택 가격이 11년 만에 전년 대비 하락세를 보였다. 전미부동산중개인협회(NAR)에 따르면 지난달 기존 주택의 판매 중간 가격이 36만3,000달러로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0.2% 떨어졌다. 전년에 비해 집값이 하락한 것은 2012년 2월 이후 처음이다. 고물가와 고금리에 주택 구매 수요자들이 관망세로 이미 돌아선 데다 실거주 목적의 주택 구매 수요자들도 주택 구입을 꺼리거나 구입 시기를 늦추고 있는 까닭이다.
자동차 판매 시장도 예외는 아니어서 신차는 물론 중고차를 찾는 소비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이 같은 현상 이면에는 계속되고 있는 고금리에 대출 이자가 크게 오른 것이 소비 수요를 얼어 붙게 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신용카드 대출에 대한 평균 금리는 지난해 4분기 19.1%로 1년 전 14.5%에 비해 4.6%포인트나 상승했다. 60개월 신차 자동차 대출 금리도 평균 6.6%로 2009년 이후 가장 높은 금리를 기록했다. 여기에 최근 SVB의 파산 여파로 각 은행들이 현금 유동성 확보를 위해 신규 대출을 자제하고 있는 것도 소비 심리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미국 소비 수요가 위축되자 해외서 들여오는 수입 물동량도 크게 감소했다. LA 항만청에 따르면 지난 2월 LA항에서 하역 처리된 수입 컨테이너 수는 48만7,846 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로 전년에 비해 43%나 급감했다.
한국 농림수산식품의 미국 수출도 타격을 입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지난 1월 대미 수출액이 1억820만달러로 전년 대비 28.5%나 감소했다. 고물가, 고금리에 금융권의 불안정성이 미국 소비 수요를 위축시키면서 미국 내 K-푸드의 확산에도 비상이 걸린 상태다.
다만 일부 경제 전문가들은 전통적으로 소비가 살아나는 봄·여름이 다가오고 미 중앙은행인 연준의 기준금리 인상기조가 마무리되면 소비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남상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