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6일 트럼프 지지자의 ‘의회 난동’
“일상적 쿠데타의 전초전으로 기록”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2021년이 저물어간다. 2년째 이어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종식은 요원하기만 하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 내 불거진 양극단의 갈등과 세계 패권을 둘러싼 중국과의 노골적인 갈등으로 국제 정치는 격동했다. 전 세계의 과제인 기후위기부터 걷잡을 수 없던 물가상승(인플레이션)까지 크고 작은 이슈도 끊임없이 불거졌다.
2021년을 미래 사람들은 어떻게 기억할까.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29일 18명의 역사학자에게 100년 뒤인 2121년, 가상의 미국 역사책에 실릴 올해의 주요 사건을 물었다. 다양한 이슈 가운데 많이 언급된 사례 네 가지를 중심으로 올해 미국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을 정리했다.
① 공격받은 미국 민주주의
가장 많은 역사학자들이 꼽은 올해의 가장 큰 미국 이슈는 새해 벽두인 1월 6일 워싱턴에서 벌어진 초유의 ‘국회의사당 난입 사태’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지지자들이 조 바이든 대통령의 당선을 부정하며 의회를 점거하고 난동을 부린 사건은 극단세력에 공격받는 민주주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이 사건은 미국 사회 상처와 분열을 지속적으로 자극하면서 정치ㆍ이념 양극화의 골을 깊게 하고 있다.
데이비드 케네디 스탠퍼드대 역사학과 명예교수는 “극도로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분노와 망상에 시달리면서 200년 이상 나라를 지탱해온 규범과 가치, 제도에 공격적 도전을 추구했다”며 “이로 인해 유권자는 더욱 양극화하고 정치 체제도 마비됐다”고 평가했다. 데이비드 블라이트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는 “21세기 미국 민주주의가 붕괴된 순간을 넘어 일상적 쿠데타의 전초전이 된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②‘영원한 전쟁’ 종식ㆍ감염병과의 전쟁 시작
‘영원한 전쟁’이 종식됐고, 또 다른 ‘영원한 전쟁’이 시작됐다. 지난 8월 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현지에서 철군하며 2001년 이후 20년간 끌었던 미 역사상 가장 긴 전쟁에 이별을 고했다. 미군 철수가 가시화하자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조직 탈레반은 대대적 공세에 나섰다. 미국은 아프간 정부가 적어도 1년 6개월은 버틸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들이 나라를 재점령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일주일에 불과했다. 신변 위협을 느낀 아프간인들의 대탈출은 혼돈 그 자체였다. 혼란스러운 철군과 그 여진은 바이든 대통령의 리더십에도 심한 내상을 입혔다. 존 개즈비니언 펜실베이니아대 중동센터 이사는 “1975년 사이공이 몰락한 이후 미국 외교정책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가시적인 패배”라고 꼬집었다.
팬데믹의 그늘은 더욱 짙어졌다. 백신 보급으로 긴 터널의 끝이 보일 거라는 희망도 나왔지만, 바이러스는 인류보다 한발 앞서 나갔다. 부스터샷(추가 접종)이란 고육책도 소용 없었다. 강력한 변이 오미크론의 등장으로 세계는 다시 1년 전으로 회귀하고 있다. 때문에 미국뿐 아니라 세계가 감염병 ‘종식’이 아닌 ‘공존’에 힘을 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알렉스 키사르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역사사회정책 교수는 “올해는 의학의 진보나 현대 국가의 놀라운 힘이 감염병으로부터 국민 모두를 완전히 보호할 수 없다는 어두운 증거를 남겼다”고 설명했다.
③ 코로나가 불러온 감염병 ‘아시안 혐오’
코로나19가 미국 사회에 불러온 또 다른 감염병이 있다. 바로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다. 지난 3월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아시아계를 대상으로 한 ‘증오 범죄’ 추정 총격 사건으로 한국계 여성 4명 등 아시아계 6명이 숨진 사건이 대표적이다. 지난 9월 연방수사국(FBI)이 공개한 혐오범죄 보고서에 따르면 흑인을 대상으로 한 혐오범죄는 전년 대비 40%, 아시아계를 겨냥한 범죄는 70% 각각 급증했다. 아시안이 미국에 뿌리내린 지 150년이 지났지만 ‘영원한 이방인’이란 사실이 새삼 확인된 한 해였다는 얘기다. 브랜다 스티븐슨 UCLA 역사학 교수는 “아시아계뿐 아니라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증오범죄도 40%나 늘었고, 성소수자, 이민자 등에 대한 공격도 늘었다”며 “2021년은 (차별이라는) 사악한 질병이 번성했던 해”라고 지적했다.
④ 쉴 새 없이 이어진 기상이변
올해 미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선 화마와 수마 등 사상 최악의 기상이변들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지난 2월 평소 온화했던 남부 텍사스에선 낮 기온이 영하 18도까지 떨어지며 30년 만의 한파가 찾아왔다. 7월 서부는 폭염과 가뭄, 산불이란 ‘이상기후 삼중고’에도 빠졌다. 캘리포니아 데스밸리 국립공원은 기온이 54.4도까지 올랐고 서부 13개 주에서 초대형 산불이 80건 넘게 발생했다.
소방력을 총동원해도 불길이 좀체 잡히지 않으면서 2,000명 넘는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등져야 했다. 두 달 뒤에는 동부 지역에 133년 만의 기록적 폭우가 쏟아지면서 뉴욕이 마비됐다. 기후 변화가 인류의 목숨을 위협하는 건 이제 이례적이지 않지만, 그간 ‘기후 대응’을 부르짖으며 전 세계에 큰소리치던 미국조차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한 세계 지도자들은 11월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 기후위기 대응책을 논의했지만 기존 대책을 재확인하는 데 그쳤다. 게리 윌스 노스웨스턴대 역사학 교수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오염 국가인 미국은 기후변화를 늦추긴커녕 가속화했다”며 “(파리협정을 탈퇴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비참한 유산은 계속되고 있다”고 일갈했다.
<허경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