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메마른 시대입니다. 눈물보다는 웃음에 더 관심이 많은 시대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웃었던 날보다 울었던 날들이 더 많은 것을 잊고 삽니다. 눈물에는 슬픔을 가득 담아 흘리는 비애(悲哀)의 눈물이 있는가 하면, 기쁨이 파도처럼 밀려오는데도 자신도 모르게 눈에서 흘러내리는 기쁨의 눈물이 있습니다. 비아 돌로로사는 세상 그 누구도 걸어가지 못한 “슬픔의 길(Way of Sorrows), 고뇌의 길(Way of Grief), 고난의 길(Way of Suffering, Way of Pain)”임을 지금도 역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 길은 실제로 존재하며 그 길을 찾아가는 참배객들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걸어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 눈물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자신의 애환(哀歡)과 연관되어 흘리는 눈물이 다반사(茶飯事)입니다. 그러나,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길을 걸어가신 비아 돌로로사 예수님의 눈물은 자신의 인생에 회한과 후회의 의미가 담긴 개인적인 일로 흘리신 눈물이 아니라, 스스로의 처지와 비참한 종말을 맞이할 줄을 까마득히 잊고 의미없는 웃음과 영문 모를 내일에 대한 대비책이 없이 오늘 하루에 만족하며 웃고 살아가는 무지몽매한 자들을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그 눈물은 눈물이 아니라 <옥구슬>입니다. 그 눈물은 눈물이 아니라 봄꽃 향기 가득한 <봄의 향연>입니다. 그 눈물은 손에도 가슴에도 담을 수 없어 차라리 영혼에 담아 영원히 간직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범한 범부들이 흘리는 가치없는 눈물을 흘리신 적이 없으십니다. 아무리 빈한(貧寒)하셔서 한 끼의 끼니조차 연명하기 어려운 극심한 가난 앞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단 한번도 눈물을 보이시지 않으셨습니다. 살점이 찢겨져 떨어져 나갈 정도로 모진 매를 맞으셔도 울지 아니하셨습니다. 예리한 송곳같은 가시관이 머리의 두피를 가르며 찢어져 선혈이 낭자하기까지한 고통의 가시관을 쓰시면서도 눈물을 흘리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가장 쓰디 쓴 잔, 이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던 그 참혹한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십자가에 높이 달려 도저히 견디시기 어려운 극한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시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비아 돌로로사의 예수님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우셨습니다.
비아 돌로로사 예수님의 눈물을 깊이 묵상하면서 진정된 참회의 기도로 예수님의 흘리신 눈물이 가슴을 적시며 그 가슴에 우러나오는 눈물의 기도를 드려야 할 때입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간곡하신 부탁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오늘의 결단이 필요한 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고다 언덕 에서 마지막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그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신 예수님을 향하여 오늘을 살고 또 내일을 살아가야 할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가를 로마서 14장 8절에서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으라”고 말씀합니다. 이 메시지의 깊은 뜻은 비아 돌로로사, 슬픔과 고통과 고뇌의 길을 걸어가시며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며 진정 섬기기를 결단한다면 자신을 위해 우시지 않으시고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 우신 것처럼 <눈물의 참회>, <참회의 눈물>로 일관하면서 비아 돌로로사 예수님을 따라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우리 또한 눈물을 흘리되, 나를 위하여 흘리지 말고 나로 인하여 예수님의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줄 수 있는 진정한 참회개를 이룰 사람들을 위해 흘려야 합니다. 비로소 우리는 비아 돌로로사 예수의 눈물이 결코 헛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