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40년 전 일이다. 내가 중국 방문 풀브라이트 미국 교수단의 일원으로 중국 광저우(廣州)에 머무를 때다. 오후에 한가한 틈이 생겨 우리가 머물던 호텔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길모퉁이에 사람 하나 겨우 드나들 수 있는 아주 자그마하고 허름한 가게가 있었다. 가게 문 앞에 세워놓은 광고판의 붉은 글씨가 내 눈을 끌었다. 모택동 주석의 인장을 새겨주었던 사람이 도장을 새긴다고 했다.
의아했지만 모택동이란 말에 구미가 당겼다. 사망한 지 10년 가까이 되긴 했어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의 영웅이며 온 중국 국민의 존경을 받는 모택동 아닌가. 감히 그의 이름을 허위로 내걸고 장사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마침 그 며칠 전 광저우 시내 면세점에 들렀을 때 아주 예쁘장한 전각돌 하나를 산 것이 있었다. 나는 한동안 서예 공부를 했던 일이 있어 전각과 낙관 인장에 관심이 있었다. 그 돌을 여기서 새기면 안성맞춤인 듯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좁은 가게 벽면엔 빛바랜 그 도장포에 관한 신문 스크랩이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도장포 사진과 모택동이라는 글자도 보였다. 안쪽 구석에서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도장을 파던 까무잡잡한 노인이 나를 힐끗 올려다봤다. 내가 중국말을 못 하는 줄 알자 가격표를 내밀었다. 서투른 필담과 몸짓이 뒤따랐다. 내 돌에 '孤村散人(고촌산인)' 넉 자를 새기는 데 얼마가 들지 물었다. 고촌은 내가 서예 공부할 때 내 스승에게서 받은 '외딴 마을'이라는 의미의 호다. 산인은 보통 아호 끝에 붙이는 '한가한 사람'이라는 뜻. 붓대 놓은 지는 오래됐으나 내 호를 새긴 낙관 인장은 언젠가 하나 만들려고 늘 벼르고 있었다. 한 자 새기는데 15위안이고 돌 옆면에 측관을 더하면 10위안, 합계 70위안이라고 했다 (미국 화폐로 23불 정도). 그곳 카펫 공장 노동자의 월급이 30불 미만일 때다. 다시 오겠다며 가게 문을 나섰다.
그다음 날 아침 서둘러 호텔 방에서 전각돌을 찾아들고 그 도장집을 다시 찾았다. 노인이 내가 내민 돌을 받아 들고 앞뒤로 돌려 보더니 놀란 표정으로 이거 어디서 났느냐고 물었다. 면세점에서 샀다니까 얼마 주었는지 다시 물어왔다. 옅은 회색에 새빨간 핏빛 무늬가 휘감기듯 돌 안에 박힌 것이 마음에 들어 25위안(미화 10불 미만) 주고 산 돌이다. 노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보통 돌이 아니라는 느낌이 왔다. 후일에 안 일이지만 그 돌은 중국에서 전각이나 돌 조각을 하는 사람들이 으뜸으로 여기는 계혈석(鷄血石)이었다. 계혈은 '닭 피'니 돌 속에 박혀있는 붉은 무늬를 보고 지은 이름이다. 내가 그 돌을 시세보다 엄청나게 싸게 샀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노인이 오후에 와서 인장을 찾아가라고 했다.
미국에 돌아와서 얼마 후 그 인장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분명 잘 보관한다고 했는데 그 행방이 묘연했고 어디에 있겠지 하고 더 찾지 않았다. 최근에 옛 서류 보관 상자들을 정리하며 오래된 편지 더미 밑에서 그 인장이 나왔다. 수십 년 만에 보는 인장 측면에 새겨 놓은 노인의 측관 글씨가 방금 깎은 듯 선명했다. "을축년 8월 74세 매노(梅奴) 노인이 양성(羊城)에서 새겨 고촌 선생에게 드린다(孤村先生雅正乙丑八月七四老人梅奴刊于羊城)". 양성은 광저우의 별칭이다. 다된 인장을 노인에게서 건네받을 때 인면의 '孤村散人' 넉 자에만 신경을 쓰고 옆에 판 작은 글씨는 대충 읽는 둥 마는 둥 했던 기억이 난다.
문득 매노 노인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그가 모택동의 인장을 새겨주었다는 기억은 생생하지만 그를 알려고 해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택동이 무명 시절에 어쩌다 도장 한 번 새겨주고 그의 명성을 이용해 장사하는 도장장이 노인이려니 했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고 깜짝 놀랐다. 매노는 중국 현대 10대 전각가로 꼽히는 사한화(謝翰華)의 필명이었다. 전각뿐 아니라 서예에도 뛰어났고 '전각 왕'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생전에 모택동은 같은 고향(후난성) 출신인 매노 노인이 새긴 인장 두 개를 주로 시를 쓴 뒤 낙관하는 데 썼고 현재 중국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갑자기 모래 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것 같았다. 그러나 기쁨과 흥분은 잠시, 귀한 보석을 오랫동안 내버려 두었던 아쉬움과 회한이 밀려왔다. 비록 40년 가까이 된 옛일이지만 전각의 명인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부끄럽고 미안하기도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던가? 볼품없는 가게 구석에 혼자 앉아 초췌한 주제꼴을 하고 도장을 파고 있던 그 노인이 그렇게 뛰어난 예술가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진작 알았더라면 그의 명품을 더 얻을 수 있었을 것을. 아쉽기도 하다. 우리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고정 관념이 얼마나 우리를 눈멀고 어리석게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매노 노인은 내 인장을 새겨준 6년 후인 1991년 80세를 일기로 타계했음을 여기에 덧붙여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