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점(Turning Point)의 인생은 “그리 아니할지라도(Yet, Nevertheless)”의 인생의 본질을 넉넉하게 소유하고 있는 인생 패턴입니다. Oswald Chambers는 이 전환점의 인생을 한 마디로 “My Utmost For His Highest”라는 말로 함축하여 표현합니다. 1년 365일이 항상 전환점을 맞이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바로 최상의 신앙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첩경입니다. 그 경지에 도달하여 최상의 하나님께 최선의 감사를 표현하여 구주 하나님의 최고의 영광에 합당한 나의 최고의 헌신을 드리겠다는 함축성 있는 감사, 이 최고의 감사, 차원 높은 감사로 20세기의 영성신학자 챔버스는 이 귀한 신앙의 궤적을 이 세상에 남기고 천국으로 귀환하였습니다.
하박국은 소선지서이면서 신앙고백시의 시편입니다. 그중에 결론에 해당하는 합 3:16-19은 금과옥조(金科玉條)입니다. 이 말씀의 중심사상은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사상과 행동과 삶의 최고봉(Utmost)을 삼겠다는 시인 하박국의 고백시입니다(참고, 합 2:4, 히10:38, 갈3:11, 히11:4). 시편기자들 중에 무려 70편 이상의 시를 서술한 시인 다윗은 하박국의 <여호와 신뢰사상, The Real and Vital psence of God>을 그의 시에 담아내고 있습니다(시 5:8, 12; 13:6; 31:15). 이 이신칭의의 믿음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이 하박국의 고백이면서 신약시대의 초대교회를 이끌어간 사도 바울과 하나님의 사람, 오스왈드 챔버스의 신앙고백입니다(롬 1:17, 갈 3:11, 히 10:38, 히 11:4).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는 <하나님을 인생의 최고봉으로> 삼습니다. 시편 50:23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의 패턴이 삶의 본질이 아니면 결코 하박국의 감사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시인 다윗의 하나님 중심의 견고한 신앙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이 신앙의 본질은 최상의 하나님을 향하여 최고의 헌신을 드리면서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라> 고백하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박국 3:16에서 자신의 <정신적 갈등과 영적 침체의 솔직한 고백>을 합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하나님의 선지자라 할지라도, 최고의 믿음의 경지에 도달하여 있다 할지라도 환난(Sufferings) 앞에서는 떨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심리적인 현상>일 뿐만 아니라, <현실의 급박함>, <현실의 한계상황>으로 인하여 <정신적 우울함(Blues)>에 빠지게 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도다”(합 3:17). 엎친 데 겹친 격, 설상가상(雪上加霜)의 난관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상황은 불변합니다. 이 불변하는 상황을 하박국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삶의 푸념>, < 영적 방황>, <정신적 고뇌>로 인한 심리적 갈등에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감사의 신앙”으로 180도 전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합3:18).
코로나 바이러스는 이 추수감사절에도 더욱 더 기승을 부리고 있는 미대륙의 현실에서 무엇으로 기쁨과 환희의 행복감에 빠지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Evergreen Wreath(상록의 면류관)”이 되는 것입니다. 변신이 아니라 거듭남의 중생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님의 역사뿐>입니다. 하박국처럼, 오스왈드 챔버스처럼,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나의 최고봉으로, 주 예수님을 나의 최고봉으로, 성령님을 나의 최고봉으로” 삼는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