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대선을 열하루 앞둔 10월28일, 제임스 코미 당시 연방수사국(FBI) 국장은 선거판을 뒤흔들 폭탄선언을 했다. 백악관 입성이 유력했던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이메일 스캔들’을 다시 들여다보겠다고 한 것. 이미 두 달 전 FBI가 수사를 종결하며 불기소 의견을 냈던 터라 미심쩍은 뭔가가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사실상의 선거 개입”이라는 민주당 측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4년 뒤 다시 대선을 목전에 둔 현재 코미의 후임인 크리스토퍼 레이(사진·로이터) FBI 국장도 익숙한 갈림길에 서 있다. FBI는 또 한 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맞상대에게 치명타가 될 수사 정보를 공개하라는 압박에 직면했다. 이번엔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의 차남, 헌터 바이든의 이메일과 동영상 자료가 표적이 됐다.
급기야 트럼프 대통령은 19일 레이 국장을 대놓고 압박했다. 그는 이날 유세차 찾은 경합주 애리조나에서 “FBI가 바이든 부자를 조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임 행정부 시절 헌터가 우크라이나에서 부당 이득을 챙겼고, 당시 부통령이던 바이든 후보가 현지 검찰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우크라이나 스캔들’ 카드를 다시 꺼내든 것이다.
앞서 15일 뉴욕포스트는 “헌터의 노트북에서 2015년 우크라이나 에너지업체 대표와 부친의 만남을 주선한 정황이 담긴 이메일이 나왔다”며 “스모킹 건(결정적 증거)”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자료의 진위와 출처에 관한 논란은 지속되고 있다.
트럼프 캠프와 여당은 ‘2016년 뒤집기’를 재연하려는 듯 총공세로 나설 태세다. 22일 마지막 대선후보 TV토론에서도 우크라이나 스캔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겠다며 총력전을 예고한 상태다. 공화당도 론 존슨 연방 상원 국토안보위원회 위원장이 레이 국장에게 “늦어도 22일까지 노트북 세부 내용의 타당성에 대해 답해달라”고 요구하는 등 화력을 지원할 채비를 마쳤다.
하지만 레이 국장은 자신은 코미와 다르다는 점을 ‘침묵’으로 웅변하고 있다고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전했다. 그는 해임 압력에도 노트북 관련 보도는커녕 수사 여부조차 확인해주지 않고 있다. 전임자의 ‘흑역사’를 의식해 FBI의 정치적 독립성을 지키겠다는 신념을 무언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해석이 나왔다.
레이 국장은 이미 2017년 7월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기소되지 않은 개인에 대해 언급하는 건 옳지 않다. 대통령이 불법적인 요구를 하면 일단 설득하고, 실패하면 사임할 것”이라고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취임 후에도 “안티파(반파시즘 극좌 그룹)는 조직이 아닌 이념일 뿐” “러시아가 바이든 겨냥 허위정보로 대선개입을 시도하고 있다” 등 백악관 심기를 거스르는 소신 발언을 이어왔다.
매체는 레이 국장이 대통령의 편을 들 정치공학적 유인도 전혀 없다고 분석했다. 의회의 초당적 지지를 받는 탄탄한 입지와 민주당에 유리한 선거 지형을 고려할 때 코미의 전철을 밟는 건 자충수가 될 것이란 얘기다.